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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Dec 18. 2021

크리스마스엔 릴레이

운동 / 러닝 이야기

누군가와 같이 달리는 것보다 혼자 고즈넉하게

나만의 페이스로 달리는 걸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경쟁하면서 달리는걸 부담스러워하는 성향이다.

평소보다 속도를 내서 달려야 하는 상황이나 전력질주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편이다.

나는 'Slow Runner'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독을 즐기는 거북이 러너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릴레이 러닝을 했다,

Run Saipan이라는 이곳 러닝 동호회에서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Annual Christmas Island Relay'라는 행사를 개최해 왔는데

오늘 처음으로 그 이벤트에 참여한 것이다.


매주 토요일엔 항상 나 홀로 장거리 러닝 훈련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스케줄이었지만

이번엔 동호회의 몇몇 멤버들과 팀을 만들어서 릴레이에 참가했다.


아침 6시에 첫 번째 주자가 출발할 예정이므로 우리 팀은 5시 30분에 모이기로 했다.

벌써부터 여러 팀의 멤버들이 도착해서 열심히 몸을 풀고 있는 걸 보니 살짝 긴장도 됐다.


사이판 최남단에서부터 북단까지 릴레이 경주를 하면서 이동해야 하는 코스라서

새벽부터 여러 대의 경찰차들이 줄지어 대기 중이었고

교통정리를 해 줄 경찰관들이 분주하게 준비 중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크리스마스 릴레이라서

우리 팀은 나름대로 산타 양말과 루돌프 헤어밴드를 하고 한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냈다.

정말 평소에는 이런 코스튬을 즐기는 스타일이 전혀 아닌데

단체로 남들도 같이 하니까 큰 거부감이나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게 묻어갈 수 있었다.

서로 응원하며 끝까지 같이 달릴 오늘의 멤버들


다섯 명의 멤버들로 이루어진 각 팀의 주자들은

각자의 순서대로 자기가 맡은 코스에서 최선을 다해 달리면 되는데

이런 경험이 처음인 나에게는 쉽지만은 않았던 도전이었다.


혼자 달릴 때야 속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었고

뛰다가 힘들면 걷거나 잠깐 쉬더라도 별 문제가 없었는데

아무리 즐기는 이벤트라지만 다른 팀의 주자들과 함께 섞여서

내 앞에서 달리는 사람, 내 뒤를 바짝 쫓아오는 사람을 신경 써가며

저 멀리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우리 팀의 다음 주자까지 생각하다 보니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천천히 즐기면서 여유 있는 속도로 나만의 장거리 러닝을 즐겨오던 나에게

오늘의 크리스마스 릴레이는 제법 강도 높고 힘든 훈련이었다.

멤버들의 응원에 힘입어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는 거북 맘

피니쉬 라인을 백 미터 남겨둔 지점에서는

모든 멤버가 나란히 함께 달리면서 팀 릴레이가 마무리되는데

땀범벅이 된 멤버들과 피니쉬 라인을 함께 들어올 때의 기분은

이제껏 이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감정이었다.


나이도 국적도 성별도 다른 멤버들이

러닝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모여서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응원하고 격려하며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이번 기회가 참으로 소중하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평소의 나답지 않게 많이 웃고 크게 떠들며 멤버들과 수다도 떨고

본의 아니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전력질주도 해가며

상쾌하고 시원한 아침 바람에

흐르는 땀과 함께 가슴속의 답답함과 머릿속에 뒤엉킨 스트레스를

모두 한 번에 날려 보낸 듯했던 오늘의 크리스마스 릴레이.


내년 크리스마스 릴레이에도 오늘의 멤버들로 꼭 다시 뭉치자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토요일 새벽의 멋진 만남을 마무리했다.


예전보다, 개인적인 공간이나 각자의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는 요즘 사람들.

팬더믹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그 현상이 더 심해져서

이제는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을 잊고 산지 오래인 듯하다.

오히려 이제는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경계하게 되고

서로 간에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게 자연스럽게 된 요즘이다.


비록,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서로 간의 육체적인 거리는 예전보다 멀어졌을 지라도

너와 나의 마음의 거리만은 너무 멀어지지 않게 노력해 보는 것도

꽤나 필요한 일이겠구나 싶었던 즐겁고 멋진 릴레이였다.


이런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했던

햇살 좋은 토요일 아침이 지나가고 있다.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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