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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Jan 02. 2022

비 오는 날엔 역시 러닝!

운동 / 러닝 이야기

속이 더부룩해서 숙면을 취할 수가 없다.

중간중간 잠에서 깨어나 뒤척거린다.

자다가도 트림이 올라오는데 갈비 냄새가 그대로 나는 것 같다.

아, 정말 죽을 맛이다.


채식주의자도 아니요, 특별히 가리거나 못 먹는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구운 김치나 파절이에 바삭하게 익은 삼겹살이나

고추냉이를 살짝 섞은 양파 절임을 윤기 좔좔 흐르는 양념갈비에 얹어

소주 한잔과 곁들이는 맛을 아는 사람인데

체질적으로 남들보다 육류를 소화시키는 기능이 떨어지는 것 같다.


남들은 아무리 길어봤자 한나절이면 뱃속에서 소화시키는 고기를

하루 24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고기가 그대로 위장에 머물러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속에서 진한 고기 냄새가 계속 올라오는 통에

신나게 씹고 뜯고 맛본 후에 밀려올 후폭풍과 불편함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마라톤을 알기 전에는

삼겹살이나 갈비 같은 육류를 먹고 난 후에

소화제를 먹고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켜다가

급기야는 남편에게 배 마사지나 손 따기를 부탁하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밖으로 뛰러 나간다.

한마디로 살기 위해 뛰러 나가는 것이다.


토요일 저녁으로 온 가족이 만족스럽게 갈비를 먹고 돌아온 후

잠자리에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느끼하고 거북한 트림이 올라오며 배가 답답해져 온다.

'오늘도 편하게 푹 자기는 틀렸구나.'

'내일 새벽에는 무조건 두 시간 러닝이다.'


알람을 맞춰놓고 속에서 올라오는 갈비 냄새를 느끼며 억지로 잠을 청해 본다.




2022년 1월 2일, 일요일 새벽을 깨우는 알람이 소리소리 지른다.

'밖에 비 오나?'


밤새 제법 비가 내린 듯하고

창밖을 살피니, 여전히 지금도 비가 오락가락 중이다.

아주 잠시 동안, 고민에 빠진다.

'어제도 새벽에 제법 뛰었는데... 지금 나가면 틀림없이 비를 쫄딱 맞을 텐데...'

'이걸 나가, 아니면 말어?'


만약 그 새벽 시간까지 속에 갈비 냄새가 생생하게 살아있지 않았더라면

밤새 가스 찬 듯 더부룩한 배 때문에 잠을 설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그냥 다시 잠을 청하며

일요일 아침의 게으르고 여유로운 늦잠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 나가서 뛰고 오지 않으면

하루 종일 뱃속에서 올라오는 갈비 냄새를 맡아야 할 것이므로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어두운 새벽길을 나섰다.


밤새 내린 비 때문에 도로 곳곳에 생긴 물 웅덩이들을 보며

오늘도 역시 새벽 러닝을 트랙에서 하기로 결정한다.

이런 날씨에 달릴 때를 대비해서 허름한 러닝화와 얇은 방수 재킷을 챙겨 나왔다.

하지만 방수 재킷은 입을 일이 거의 없다.

워낙에 비 맞고 뛰는 걸 즐기기도 하지만

방수 재킷을 입고 달리면 답답해져서 장거리 러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러닝화 서너 켤레를 번갈아 가면서 신는데

날씨나 상황, 목적에 따라 선택이 달라진다.

대회용, 훈련용, 그리고 악천후용.

러너라면 기본적으로 이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


자, 오늘은 쉬지 않고 두 시간을 달려보자.

속도는 편안한 정도로 너무 숨이 차지 않게

무리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달리되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벽의 어둠 속에 숨어있던 차가운 빗줄기가 잠이 덜 깬 내 몸을 휘감는다.

시작이다!




마라톤 대회 전날에는 위에 부담이 없는 탄수화물 위주의 가벼운 식사를 해야 한다.

평소에도 달리기 전에 뭔가를 먹고 뛰는 것보다

차라리 뱃속이 비어있는 상태가 러닝에 더 유리하다.


지난밤의 갈비 섭취는 그다지 과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몸을 무겁고 둔하게 만들고 있었다.

5킬로 정도 거리를 달릴 때 까지는

이 거북함과 불편함을 고스란히 느끼며 달려야 했지만

그 이후, 서서히

드디어 내 뱃속에서 어제 먹은 갈비를 소화시키는 작용이 일어나고 있음

온몸으로 아주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제 살았구나!'


달리면 달릴수록 점점 뱃속의 가스가 빠져나가는 듯하더니

몸이 가볍게 느껴지고 더부룩했던 배가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빗줄기는 점점 강해지더니

급기야는 비가 옆으로 내린다.

거센 새벽바람 덕분에 빗줄기가 위에서 차분하게 떨어지지 않고

옆으로, 앞으로 제 맘대로 흩날린다.


이미 러닝화는 흠뻑 젖어서 무거워진 지 오래이고

젖은 트랙 위를 첨벙 거리며 나 홀로 달리고 있다.

머리에 쓴 모자의 챙을 타고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지붕 밑 처마따라 흐르는 빗줄기처럼 보인다.


잠깐 수그러드는 듯하다가 어김없이 세찬 비를 계속 퍼붓는 하늘은

오늘만큼은 따스한 아침 햇살이 찾아드는걸 원치 않는다는 듯

시커멓고 무거운 비구름만 잔뜩 몰고 와 있다.


개인적으로 화창하고 맑은, 해가 쨍쨍한 날씨보다

흐리고 구름이 잔뜩 낀 날씨가 러닝 하기에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가볍게 흩날리는 보슬비 정도는 오히려 달리는데 도움이 될 정도이다.


오늘처럼 이렇게 장대비를 맞으면서 달리는 것도 때로는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기록을 위한 러닝이 아니라면

가끔은 비를 맞고 달려보기를 추천한다.


비록 달리는 발은 흠뻑 젖고 미끄러워서 다소 무겁고 불편할지 모르나

땀에 젖은 온몸은 물론, 머릿속과 마음속의 모든 찌꺼기들이

빗물에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에

상쾌하고 개운해지다 못해 짜릿하고 가슴이 벅차오르기 까지 한다.


두 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면서

오늘은 물을 한 번도 마시지 않았는데

줄곧 내리는 빗물 덕분이었다.


운이 좋게도 이곳은 아직 대기오염에서 자유로운 곳이라

깨끗한 자연환경이나 공기 하나만큼은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따라서 집집마다 빗물을 따로 모아두는 빗물통이 있는데

빗물통에 모인 빗물을 비상시에

샤워할 때나 세탁할 때 등, 생활 용수로도 사용할 정도이다.


새해의 첫 일요일 새벽, 우중 러닝 덕분에

빗물 샤워로 온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고

목이 타는 갈증과 피로감에 멈추고 싶어질 때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떨어지는 빗물을 드링킹 하면서 다시 기운을 차려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두 시간 동안의 slow 러닝이 끝났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18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린 후

10분 정도 마무리 워킹을 하고

환상적인 빗속의 러닝을 마쳤다.


혹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달려본 경험이 있다면

승천할 것 같은 상쾌함과 개운함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안타깝게도 아직 우중 러닝의 경험이 없다면

한 여름 장마철에 한번 시도해 보기를 강력 추천한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환상적이고 멋진 경험이 될 거라고 자신한다.


마라토너가 되기 전의 내겐

비 오는 날엔, 부침개와 만화책이 진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비 오는 날엔 역시 러닝이다!


어색한 설정샷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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