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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Jul 25. 2022

친정 엄마와 추억 만들기

거북 맘의 미국 여행기 5화

나이아가라에서의 세 번째 아침이 밝았다.


"에혀, 당신 혼자 애들 데리고 고생이 많겠네... 수고해"

"틈틈이 사진 주고받고 서로 연락하자고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아이들을 데리고

서둘러 짐을 꾸려 출발 준비를 하는 남편을 배웅하며 짧은 인사를 나눴다.

얼굴 가득 기대와 흥분이 잔뜩 서려있는 녀석들을 태우고

남편은 그렇게 4일간의 일정으로 토론토로 떠났다.

4일 후에 저 삼 부녀들은 과연 어떤 추억과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 올 것인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이제, 엄마랑 나만 남았네."

"우리도 여유 있게 이 자유로움을 누리고 즐겨봅시다, 김여사!"


거들먹거리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는 나를 쳐다보시던 어무이가

피식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오롯이 엄마와 함께하는 4일간의 일정 중

가장 첫 번째 스케줄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쇼핑'이었다.


우리 김여사의 쇼핑 스타일은 워낙에 확고하시다.

비싸다고 다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며

명품에 관심이 있으신 것도 아니지만

액세서리, 특히 귀걸이에 관심이 많으셔서

어딜 가시든 항상 귀걸이 코너를 그냥 지나치시는 법이 없다.


게다가 패션에 대한 철학도 워낙에 당신만의 개성이 뚜렷하신지라

어지간해서는 김여사 맘에 꼭 드는 스타일을 찾기가 쉽지 않다.


"에혀... 이제 낼모레면 나이 80이 코 앞인데...

옷은 더 사서 쟁여두면 뭐하고, 귀걸이는 더 이상 뭔 필요가 있겠냐'

"내가 뭐 어디 출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동안 충분히 사모을 만큼 사모아서, 이제 더 이상 욕심도 없다."


모든 것을 이미 초월한 듯 한 김여사의 이런 멘트를

그동안 족히 수십 번은 들었던 것 같은데...

김여사는 이번에도 똑같은 멘트를 날리면서

열심히 귀걸이를 구경하고 옷을 고르고 계신다.


나도 여자지만, 여자들의 쇼핑 본능은 참 희한하고 대단하다.

꼭 필요한 것을 살 때 외에는 백화점이나 쇼핑몰을

그냥 목적 없이 구경하며 돌아다니는걸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 나로서는

쇼핑에 비중을 크게 두는 편이 아닌데

우리 어무이는 여행의 주요 목적 중에 하나가

아울렛이나 쇼핑몰, 기념품 샵 방문이니 말이다.


게다가 더욱 놀랍고 신기한 건

다리도 조금 불편하시고 오래 걷는 것도 힘들어하시는 양반이

쇼핑을 하실 땐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생산되는 것인지

몇 시간을 돌아다니셔도 생각보다 많이 고단해하질 않으신다.


"아니, 엄마! 이제 귀걸이 그만 사신다며!"

짓궂게 놀리듯 묻는 내게 김여사가 대답한다.


"이건, 나한테 없는 디자인이라서 사는 거야."

"너는 다다익선도 모르니?"


'아, 녜녜~ 어련하시겠습니까.'


캐나다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는

'Outlet Collection at Niagara'에서의 즐거운 시간이

너무도 아쉽게 후딱 지나가고 있었다.

오픈 시간 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폐장 시간이 가까워 올 때까지

참 부지런히 구경하고 쇼핑하면서 에너지를 불태웠다.


아직도 여전히 쇼핑에 진심인 김여사를 보며

감사하고 안심이 되는 마음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인지...

엄마가 좀 더 오랫동안 쇼핑을 즐기시길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해 본다.



이번 여행에서 제법 공들여 검색하고 이것저것 비교하며 신중하게 결정했던

엄마와의 여러 가지 일정들 중 한 가지는 바로

'와이너리 방문'이었다.


캐나다가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나라들 중 하나라서 그런지

나이아가라 폭포 주변과 그 일대에는 크고 작은 포도 농장과 함께

와인을 직접 제조하고 판매하는 곳들이 많았다.


평소, 와인을 조금씩 즐기는 김여사를 위해

수많은 와이너리들 중 가장 크고 후기가 좋은 곳을 찾아

와이너리 투어를 예약했다.


Peller Estates라는 이곳은

다른 와이너리들에 비해 규모가 굉장히 크고

특히 다른 와이너리에는 없는 '얼음 지하창고'에 '아이스 와인'을 진열해 놓고

방문객들이 얼음 궁전 안에서 사진 촬영도 하고 아이스 와인을 시음하기도 하면서

그 유명하고 귀하다는 캐나다 산 아이스 와인의 생산과

제조과정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아이스 와인의 맛에 만족스러워하는 김여사


디저트 와인으로도 불리는 아이스 와인은

일반 와인을 생산할 때처럼 여름에 포도를 수확하지 않고

한 겨울에 얼어있는 포도를 수확해서 훨씬 당도가 높고

게다가 아이스 와인 한 병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가지 종류가 아닌 여러 가지의 포도가 조금씩 함께 들어가야 해서

만들어진 양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이라고 한다.


생전 처음 느끼는 아이스 와인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에

김여사도 나도 홀딱 반해버린 나머지, 주저하지 않고 몇 병을 구입하기까지 했다.


와이너리 투어를 신청하면 같은 시간대에 예약한 다른 방문객들과 함께

와인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며

드넓은 포도밭 견학과 총 4가지의 와인 시음을 한 후,

지하에 있는 와인 숙성실까지 내려가서

숙성 중인 와인이 저장돼 있는 배럴들을 구경할 수 있다.

지금은 이렇게 작고 귀여운 베이비 포도지만 한 여름의 태양과 만날 몇 달 후에는 우리가 아는 알갱이 굵고 탐스러운 포도가 된다고 한다.


우리가 예약한 시간대에는 총 열 명 정도의 인원이 한 팀이 되었는데

유럽에서 왔다는 가족들도 있었고, 미국의 다른 주에서 여행 온 커플도 있었다.


친절한 설명과 함께 우아하게 와인을 따라주던 캐내디언 총각


평소, 식사할 때도 너무 급하게 빨리 드시는 습관 탓에

남들은 아직 여전히 음식을 먹고 있는 중임에도

이미 혼자 식사를 다 마칠 정도로 성격 급한 우리 김여사는

와인을 시음하면서도

남들은 홀짝 거리며 여유 있게 음미하는데

혼자서만 원샷을 때리는 화끈함을 보여주셨다.


"아, 엄마... 쫌! 천천히 음미하면서 드시라고!"


뭔가  이국적이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와이너리 방문은

엄마도 나도 제법 만족도가 높았었다.


남편을 아연실색하게 했던 첫날의 대박 실수와는 달리

이제는 덩치 큰 픽업트럭에 제법 적응을 하고 그새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내비게이션에 의지해가며 여기저기 거침없이 돌아다니는 수준에 이르렀다.

심지어,

"차는 자고로 커야 운전할 맛이 나지!"

"안전하기도 하고 말이야, 차가 좀 높고 커야 내려다보며 운전하는 맛도 있는 거지, 암만!"

이런 자신감과 파이팅 넘치는 소리를 해가며 거들먹거리기까지 했다.

많이 컸다, 거북 맘.



만족스러운 와이너리 투어를 마치고

넓게 펼쳐진 포도 농장들 주변을 드라이브하면서

캐나다 외곽의 경치를 실컷 즐긴 후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맛난 음식을 포장해 와서 와이너리에서 구입한 와인과 함께

김여사와 멋진 저녁 한때를 보내며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우리 김여사의 술버릇은

술이 적당하게 오르면 꼭 옛날 예적 이야기를 꺼내신다는 거다.


나이아가라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지,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하고 기분이 좋은지,

내일은 또 어디에 갈지,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되도록 이런 걸 떠올리길 바라는데


김여사는 자꾸만 힘들고 어렵고 속상했던 옛날로 돌아가신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게 술의 힘이고, 그것이 어쩌면 인간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큰 딸의 어마어마한 잔소리 폭격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예전 기억을 소환하며 시작되는 김여사의 신세한탄과 술기운에 울먹거리시는 난감한 상황을 한 번에 확 정리해 버리고 만다.


"아따, 김여사! 그만하시라고 쫌!"

"좋을 땐 좋은 것만 생각하고 좋은 얘기만 합시다 쫌!"


역시 김여사에겐 큰딸의 잔소리가 특효약이다.


김여사와의 알콩달콩, 티격태격한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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