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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Apr 27. 2023

토요일엔 역시 언덕훈련!

사이판 북쪽 지역 달리기

2023년 4월 22일 토요일


시간 한번 참 빠르다, 벌써 토요일이라니...

주말이 다가오면, 소풍 가는 아이처럼 마음이 설레고 기분이 들뜨기 시작한다.

두 고등학생 딸내미들이 학교를 가지 않는 주말에는

여유 있게 마음껏 나만의 훈련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평일엔 새벽에 한 시간 정도, 집에서 가까운 조깅 코스에서 후다닥 달리고 들어와야 하지만

토요일 새벽이나 일요일 아침엔 먼 거리 때문에 평소엔 잘 가지 않는 곳을 찾아

20킬로 이상의 장거리 훈련을 맘 놓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나 홀로, 사이판 북쪽 지역의 관광 포인트들을 달려보기로 했다.

2차 세계 대전의 격전지였던 사이판엔

곳곳에 전쟁의 흔적과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있다.


새벽 3시 30분쯤 일어나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치고

주섬주섬 필요한 것들을 챙긴 후

차를 몰고 섬의 북쪽 지역으로 향한다.

인가가 거의 없는 곳이라 유난히 어둡고 조용한 곳.

친구들은 놀라며, 아무도 없이 깜깜한 새벽 시간에

혼자서 산길과 언덕을 달리면 무섭지 않으냐고 하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와야 식겁하지

짐승이든 귀신이든 당최 무서울게 뭐 있냐고 피식거리는 나는

아무래도 타고난 강심장을 갖고 있는 아줌마인 듯하다.


칠흑같이 어두운 주변 탓에

출발 포인트로 정한 한국인 위령탑의 주차장을 지나쳐서 다시 돌아와 차를 세웠다.

깜깜한 하늘엔 보석 같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새벽 산바람에 나무들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는 중이었다.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시간,

러닝 재킷을 입고 GPS 시계를 켠 후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포인트는 해발 249 미터의 Suicide cliff,  자살절벽이다.

전쟁에서 패한 일본군들이 뛰어내려 자결한 곳.

예전엔 아이들과 가끔 하이킹을 하러 오던 곳이었는데

이 코스를 걷지 않고 뛰어오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꾸준한 반복 훈련으로 인해 이제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소화한다.

편도 5킬로가 조금 넘는 거리이지만 가파른 경사가 이어진 코스라서

결코 만만한 포인트는 아니다.


자살절벽 꼭대기에 도착하니 아직도 어두운 주변 때문인지

자동 발전기가 여전히 작동하며 주변을 밝혀주고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급수를 한 후 두 번째 포인트로 이동한다.


올라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내리막길을 2킬로 정도 달린다.

내리막길을 달리는 요령도 이제는 제법 터득을 해서

더 이상 부상이나 통증에 시달리지 않게 됐다.

오르막보다 쉽다고 신나게 마구 달려 내려갔다가는

한동안 된통 고생을 하게 되기 때문에 내리막 달리기는 주의가 필요하다.


두 번째 코스는 Grotto 다이빙 포인트.

사이판에 산지 20년이 넘어가지만 다이빙을 해본 적은 없다.

물에서 하는 액티비티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스노클링 몇 번 해본 것이 해양 스포츠의 전부이다.


독특하고 신비한 그로토 동굴 다이빙 포인트는

사이판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 만점인 곳이다.

수질 관리를 위해 선크림이나 오일을 바르는 행위가 금지돼 있는 그로토는

이 세상 장소가 아닌듯한, 환상적인 바닷속 천국 같은 곳이라고 한다.

제법 경사진 언덕 하나를 끼고 있는 코스, 하지만 달릴만하다.

어느새 환해진 주변을 둘러보며

그로토 동굴 넘어 보이는 바다를 잠시 감상한 후

다음 코스로 이동하며 달리기 시작한다.


새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새섬을 지나자마자

길이 끝난 듯 보이는 곳에서 시작되는 비포장길.

Kalabera cave라는 동굴로 이어지는 코스이다.

이곳도 다이버들에게 인기 있는 포인트라는데 아직 가 본 적은 없다.

양쪽으로 아치를 이루며 늘어서있는 나무들의 환영을 받으며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이리저리 소똥을 피해 가며 달리다 보면

칼라베라 동굴의 주차장 입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근처에 목장과 농장이 있어서 그런지

달리는 길 한가운데 소똥이 있기도 하고 냄새도 제법 코를 찌르지만

평소 아스팔트 길에서 느낄 수 없는 재미와 색다름이 있다.

달려왔던 길을 되짚어가면 다시 새섬과 만나고

잠시 숨을 고르고 급수를 하며 바닷바람에 땀을 식힌다.

여기까지 대략 16킬로 정도를 달려온 것 같다.


완만한 경사길과 제법 가파르고 힘든 오르막이 이어진 언덕을

벌게진 얼굴로 씩씩 거리며 뛰어 오른 후, 잠시 멈춰 숨을 골라야만 했다.

'아, 진짜 죽겄네.'

요즘 애들 표현으로 '개 힘듦'이다.


이후에 2킬로 정도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달리는 동안

심박수도 안정이 되고 페이스도 올라갔다.


마지막 코스는 깊이 1만 4천 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가 있는 Banzai cliff, 만세절벽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끝까지 저항하던 일본군들이

천황 만세를 외치며 뛰어내렸던 80미터 높이의 깎아지른듯한 절벽이다.


만세절벽까지 찍고 다시 출발 지점인 한국인 위령탑으로 돌아오면

총거리가 23킬로 정도 나온다.

급수하며 잠시 숨을 고를 때를 제외하면

걷지 않고 계속 달렸다는 점에 스스로 만족해하며

그동안의 훈련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체력과 근력이 많이 올라왔다는 증거이기도 하겠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 차례씩 언덕 훈련을 하고 나면

평지에서의 달리기가 훨씬 가볍고 수월하게 느껴진다.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려면 42.195km라는 거리를

초보자 기준 4~5시간, 혹은 그 이상 동안을 달리며 버텨줄 다리의 힘과 체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터벌 러닝 등 다양한 훈련들이 요구되곤 하는데

개인적으로 LSD로 불리는 장거리주와 언덕 훈련을 가장 좋아한다.


사실, 오늘 달렸던 포인트들은 주로 관광객들의 렌터카나 관광 가이드들의 밴이 다니는 코스이고

산악자전거나 로드 바이크를 타는 바이커들이 선호하는 지역이라

나처럼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헉헉대며 뛰어다니는 사람을 보기란 쉽지 않다.


편하고 무리가 되지 않는 페이스로 사이판 북쪽 지역의 이곳저곳을 달렸던 오늘의 훈련.

뿌듯하고 스스로 대견스럽다.

점점 단단하고 강해지는 내 다리가 사랑스럽다.

풀코스 마라톤을 훌륭하게 완주하는 그날까지

나의 고독한 훈련은 계속되어야 한다.


아줌마의 힘!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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