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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Apr 28. 2023

트랙 105 바퀴 달려보셨수?

한국 아줌마, 신문에 실리다!

사실, 나의 풀코스 마라톤 준비는 작년 8월부터 시작됐다.

몇 년 동안은, 페이스나 심박수, 케이던스 등 기록이나 수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저 음악을 들으며 유유자적하게 혼자만의 조깅을 즐겨왔었는데

Run Saipan이라는 로컬 러닝 동호회에 가입한 2년 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열리는 크고 작은 레이스에 참가하게 되면서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달리다 보니

슬슬 경쟁 심리가 발동하게 되었고

아닌 척하면서 사실은 승부욕이 무척 강한,

나의 잠재돼 있던 근성이 깨어나게 된 것이다.

본격적으로 러닝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게 된 계기였고

러닝이나 마라톤에 관련된 국내외 기사들을 검색하며 섭렵하는 건 기본이었으며

유튜브나 티브이 프로그램도 오로지 러닝에 관련된 것들만 시청했다.


그런 과정에서 점점 달리는 거리가 늘어나고

더디지만 속도도 조금씩 빨라지면서 개인 기록이 향상되기 시작했고

그 재미에 빠져 개인 훈련에 더욱 박차를 가하면서

아무도 없는 새벽이나 깜깜한 오밤중에도 밖에 나가 혼자서 참으로 전투적으로 열심히도 달리고 달렸었다.


21킬로, 하프 마라톤 거리를 드디어 정복하고

몇 차례 대회에도 참가한 이후엔

누구나 그렇듯 슬슬 42킬로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왕 러닝을 시작했으니, 풀코스는 한번 뛰어봐야지.'


혹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뭔 놈의 마라톤 준비를 그리 오랫동안 해?'

'그까짓 거 몇 달 준비해서 대충 뛰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럴 수도 있다.

유튜브 같은 거 보면, 특히나 젊은 친구들은

죽어라 두어 달 준비해서 무사히 마라톤을 완주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나이 핑계를 대고 싶진 않지만, 아무래도 아예 무시할 수 없기도 하고

사람마다 갖고 태어나는 체력이나 조건이 다른데

골골대는 약골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타고난 강철체력의 소유자도 아닌 나에게

풀코스는 그리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나이대가 비슷하고 기록도 엇비슷한 필리핀 친구와

5킬로 내지는 10킬로 레이스에 참가해서 함께 달려보면

피니쉬 라인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들어온다.

여유 있게 웃으며 들어오는 그 친구와는 달리

오만상을 찌푸리며 세상 혼자 달리고 온듯한 표정으로

거의 초주검이 되어 피니쉬 라인에 굴러 들어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정이다 보니

체력이나 심폐 기능이 타고나게 월등하진 못하다는 것일 게다.

다만 그 부분을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으로 메꾸고 있을 뿐...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남들은 30~35킬로 정도까지만 뛰어보고 마라톤에 참가해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스스로를 너무 잘 아는 나는

그건 나에게 해당되는 경우가 아님을 진작에 간파하고

혼자만의 훈련을 꾸준히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대회 참가 전, 최소한 42킬로 까지는 달려봐야

실제 대회에서 멘털이 털리는 일은 없겠다 싶어서

42킬로를 목표로 주말마다 400미터 트랙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장거리 러닝이다 보니, 새벽 4시도 되기 전인 아주 이른 새벽시간에 달리기를 시작해야 했는데

(열대지방인 이곳은 해가 뜨고 나면 더 이상 달리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떠돌이 개들이나 오고 가는 도로의 차량들을 신경 쓰지 않고

안전하게 장거리 훈련을 할 장소로는 트랙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목표는 하프 마라톤 거리인 21킬로를 넘기는 것.

적어도 내 경우엔 생각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기간이 꽤 오래 걸렸다.

시작할 땐 늘, 왠지 오늘은 목표 달성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구간인 17~18 킬로 지점에 다다르면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어서 빨리 21킬로를 채워서 끝내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해졌다.

그렇게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도 없이 도전한 결과

드디어 25킬로를 찍었으니, 그게 바로 작년 8월 13일이었다.

이것도 뭐, 아주 여유 있게 완주한 건 아니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돼서 누가 봐도 쓰러지기 일보직전으로 보일만큼

녹초가 되고 힘들었던 목표 달성이었다.

다음 목표는 30킬로미터 정복.

더 말해서 무엇하랴.

이것 역시 여러 차례의 실패와 도전 끝에

25킬로를 성공한 2주 뒤인 작년 8월 27일에 성공.

그 일주일 뒤인 9월 3일에 33킬로 성공.

그리고 3주 뒤인 9월 24일에 마침내 35킬로를 깨는데 성공!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트랙에서 성공한 이 기록들은

내 맘에 들게 만족할만한, 퍼펙트한 과정들로 이루어진 성공이 아니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욕심 같아선, 급수나 보급할 때를 제외하고는

목표한 거리에 도달할 때까지 쉬지 않고 달리고 싶었지만

너무 힘든 구간에서는 자주 걷기도 했고

잠깐 물만 마시고 다시 뛰겠다는 마음과는 달리

트랙 바닥에 주저앉아 한동안 널브러져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35킬로를 찍고 난 이후 제대로 현타가 온 나는

아무래도 풀코스 마라톤은 내게 무리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드디어 올해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재도전을 하게 됐으니

2023년 1월 21일에 결국 트랙에서 42킬로를 깨는 데 성공했다.

(아, 그날의 감동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온다)

400미터 트랙에서 42킬로를 채우려면

105바퀴를 뛰어야 한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게 된 날이기도 했다.


이날 새벽 3시 40분경부터 시작된 혼자만의 외로운 레이스는

5시간이 조금 넘은 시각인 아침 8시 40분까지 이어져서

새벽 운동을 하러 트랙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마치고 다시 돌아갈 때까지

끝도 없을 것 같이 지루하게 트랙을 돌고 또 돌았다.


하지만 결국엔 해냈다.

그리고 이번 도전에서는 급수할 때와 에너지젤을 섭취할 때를 제외하고는

걷거나 멈추지 않고 느린 페이스지만 계속 달렸다.

'부단히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았더니, 이게 되네?'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의 달콤한 결과를 맛보며

그날 이후 한동안 러닝 동호회의 회원들과 친구들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축하와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다.


"엥? 이런 것도 기사 거리가 되나요?"


사이판의 오래된 로컬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다.

스포츠 기사를 담당하는 기자인데,

이런저런 레이스나 러닝 대회 때마다 취재하는 걸 봐온 터라

안면은 있는 사이였다.


최근에 내가 트랙에서 혼자 42킬로를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그 내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꽤 여러 가지 질문들을 메일로 보내왔다.


'아니, 아무리 큰 이슈 없는 작고 조용한 섬이라도 그렇지, 이런 게 기사 거리가 되나?'

조금은 당황스럽고 민망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랑스러운 부분도 있어서

질문 하나하나에 정성껏 답을 해서 메일을 보냈다.


며칠 뒤 일간 신문 스포츠 면에는,

42킬로 완주를 막 마치고 셀카로 찍은

대짜리 만한 내 얼굴과 함께

트랙 105바퀴를 달린 여자의 기사가 실렸다.



이젠...

마켓이나 식당을 가도, 조깅 코스에서 달리는 중에도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대부분의 반응이

"아니, 어떻게 트랙 105 바퀴를 돌 수가 있냐."

"멘털 싸움의 승리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등이다.


그렇다.

로드에 비해 안전하고 관절에 무리도 덜하다는 트랙의 확실한 장점이 있는 반면,

장거리 훈련을 하기엔 너무도 지루하고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도 하다.


사실, 올해 3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사이판 국제 마라톤 참가를 목표로 했던 훈련이었는데

너무도 실망스럽고 아쉽게도

올해는 대회 자체가 취소되고 말았다.

하지만, 계획은 다시 새로 세우면 되는 일이다.


아이들 방학이 시작되는 6월쯤, 오랜만에 한국 방문을 계획 중인데

그래서 요즘, 한국에서의 한 여름 마라톤 도전을 위해

나름대로 강한 훈련을 하며 준비 중이다.


그냥 취미로 달리는 줄만 알았더니

이 눔의 마누라가 점점 더 유명해지는 거 아니냐며 너스레를 떠는 남편도

늘 내게 큰 힘이 돼 주는 조력자이다.

연년생 두 고딩이 녀석들에게도 이미, 엄마는 맨날 뛰는 사람으로 각인돼 있다.


열심히 달리다 보니, 이런 재밌고 즐거운 이야깃거리와 추억이 생기게 됐다.

아마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하다.


그나저나 트랙에서 105바퀴 달려봤수?

안 달려봤으면 말을 마슈!


기사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링크를 걸어둔다.


https://www.mvariety.com/sports/ann-bang-completes-42k-in-105-laps/article_acf8b53e-9a5a-11ed-a26d-37cd101304e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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