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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May 01. 2023

갱년기와 달리기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요?

2023년 4월 29일 토요일


새벽 3시 20분, 알람이 울린다.

토요일엔 대회 스케줄이 없는 한, 늘 장거리 훈련을 한다.

'오늘은 오랜만에 30킬로를 달려볼까.'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꼼꼼하게 스트레칭을 해준다.

두어 달 전에 고관절 부상으로 거의 한 달 가까이 고생을 한 이후로는

특히나 고관절과 중둔근, 대둔근 위주의 스트레칭과 강화운동을 공들여서 하고 있다.


말로만 들어왔던 갱년기 증상이 본격적으로 작년부터 찾아왔다.

워낙에 러닝을 열심히 해 오고 있어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호르몬의 변화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나도 결국 이렇게 늙어가는구나, 노화는 어쨌든 피할 수 없는 과정일 테니...'

살짝 씁쓸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낙담하는 정도까진 아니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뭐...


갱년기에 접어든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사실, 앞으로 어떤 증상들이 찾아올지는 잘 모르겠다.

이미 주변에서 익히 들어왔던 대표적인 증상들을 알고 있긴 하지만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의 증상들은 아직 찾아오지 않은 듯하고

다만, 시도 때도 없이 속에서 마치 불덩이 같은 것이 뜨겁게 훅 올라오는 열감과

얼굴은 물론 온몸에서 줄줄 흐르는 식은땀 때문에 한동안 고생을 많이 했었다.

무척이나 당황스러웠고, 동시에 삶의 질을 확 떨어뜨렸던 그 증상은

다행히 좋은 보조제를 찾아서 지금은 많이 안정이 된 상태지만

만약 이 증상을 계속 겪고 있었더라면, 모르긴 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 만큼 꽤 큰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스트레칭을 마치고, 이온음료와 물병들, 에너지 젤도 여유 있게 챙겨서 집을 나선다.

장거리 훈련을 할 때 적재적소에 급수와 에너지 보충을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자칫, 부상을 입거나 건강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고, 확실히 운동 후에 회복도 많이 더디다.


오늘의 코스는 매일 아침 새벽 조깅을 즐기는 장소인 비치로드이다.

사이판 주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산책코스이자

새벽이든 밤이든, 언제나 안전하고 아름다운 곳.

탁 트인 푸른 바다를 끼고 5킬로미터 이상 쭉 이어진 산책로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길고 완벽한 조깅 코스이다.

20년 전, 처음 사이판에 왔을 때도 이 비치로드를 보고 한눈에 반해서 푹 빠져버렸던 기억이 난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의 최애 장소인 비치로드.


새벽 4시 9분, 드디어 30킬로 장거리 훈련 시작이다.

아무도 없는 비치로드를 나 홀로 달리는 기분, 산책이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보이려면 아직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한다.

차들도 어쩌다 가끔 지나갈 뿐, 적막하고 고요한 새벽의 여유를 홀로 만끽하며 천천히 달린다.

이 맛에 새벽 달리기를 하는 거지!


나 홀로 훈련은 장점이 참 많다.

물론 그룹 훈련을 통해서도 배우는 게 많지만, 굳이 한쪽을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나 홀로 러닝을 택하겠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거나 스케줄을 맞출 필요도 없고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할 수도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유튜브 등에서 얻은 정보나 지식 등을 직접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번엔 호흡을 이렇게 한번 바꿔 볼까? 팔 치기 자세를 좀 더 신경 써 볼까?'


어느새 20킬로를 달렸다.

목표한 거리까지 10킬로가 남았는데, 슬슬 꾀가 나기 시작하면서 적당히 나 자신과 타협하려고 한다.

'이만하면 오늘은 충분한 것 같은데, 5킬로만 더 뛰고 25킬로에서 마무리하는 게 어떨까?'

'내일 또 뛰면 되잖아, 조금 있으면 해도 뜰 텐데...'

달리는 내내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갈등을 한다.


마라톤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말... 아무리 생각해도 명언 중에 명언이다.

중간에 그만두고 포기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그 힘들고 외로운 싸움을 스스로 즐기면서 한다는 게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 하기도 하다.


결국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오늘의 훈련.

천신만고 끝에 30킬로를 채우고, 목욕을 한 듯 푹 젖은 온몸의 땀을 식히며

이온 음료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오늘도 해냈구나.'



아직 젊다면 젊게 볼 수도 있고,

또 어찌 보면 이제 나이의 무게를 완연하게 느낄 수 있는 시기에 접어든 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이게 발버둥 치고 피한다고 해서 달아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우연히 찍은 사진 속에서도, 무심히 들여다본 거울 속 얼굴에서도

아무리 조금이라도 어려 보이려고 갖은 수를 써도

이제 어쩔 수 없이 나이가 훤히 보이는 때가 온 것이다.


또래 아줌마들이 한국에 한 번씩 다녀올 때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좌우지간 어딘가가 달라져서

한동안 뻣뻣하고 어색한 마네킹 같은 얼굴로

쭈뼛거리며  마켓에서 서로 인사를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아예 낯선 얼굴이 되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다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이참에 나도 한번 튜닝을 좀 해볼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게다.

하지만 갱년기는 겉으로 보이는 외모나 신체적인 변화 같은 증상에서만 느껴지는 게 아니더라.

예전보다 자신감도 떨어지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데 소극적이며

만사가 귀찮아지면서 내면이 늙어가는 게 느껴진다.


그렇다.

중년 여성들의 최대 관심사와 화두가 되는 갱년기는

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몸과 마음, 안팎으로 여성의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한 1~2년이면 갱년기가 끝나고 지나가는 건가?"

우리 남편은 물론, 많은 남성들이 갱년기는 잠깐 앓고 지나가는 감기처럼

오래지 않아 끝날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하긴, 나 역시도 그랬다.

완경이 되기 전부터 완경 이후까지...

어떤 사람은 10년이 훨씬 넘게 갱년기 증상에 시달리는 경우있다는 걸, 나 역시 몰랐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근데 아무리 봐도 즐길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 힘들고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어떻게 즐길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극복하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찾고 노력하는 과정일 뿐, 즐긴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갱년기를 극복하기 위한 나의 무기는 역시 달리기이다.

달리기가 없었다면 이미 나는 갱년기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을 것이다.

나에겐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취미가 아닌 달리기.

달리기는 나의 살 길이요, 처방약이자 종합 비타민이다.


나의 갱년기 극복을 함께 할 전우가 되어 줄 달리기.

갱년기뿐만 아니라 60~70살 이후에도,

건강과 여러 가지 조건이 허락하는 한

호호백발이 된 노년까지 나의 파트너가 되어 줄 달리기.


당신의 노년을 위한 파트너는 무엇인지...

그것이 운동이든, 다른 취미 생활이든

늘 함께 할 친구 같은 동반자가 있다는 건

당신의 삶을 꽤 의미 있고 신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자신한다.


장거리 훈련 후에는 역시, 술과 고기가 빠질 수 없다.

영양 보충과 더불어 열심히 달린 나에 대한 보상이랄까.


오늘도 내일도 달리는, 마라토너 거북 맘.

앞으로의 내 삶이, 달리기와 함께 오랫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길 소망해 본다.

아자아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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