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으로 피어난 하얀 섬

토끼섬의 문주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굴동포구에 이르면, 손에 닿을 듯 하얗게 물든 작은 섬이 눈앞에 펼쳐진다. 토끼섬이다. 여름이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문주란꽃이 섬을 하얗게 물들이고, 그 모습은 오래도록 마음속 그리움의 풍경이 됐다. 단숨에라도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쉽게 닿을 수 없는 곳. 가깝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그 섬이, 나에게는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선망이었다. 늘 그리웠지만,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그 섬을 품어야 했다.


푸름과 어우러지는 하얀 일렁임이 다가오다 멀어졌다. 토끼섬으로 선뜻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토끼섬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서 있던 내게, 하도리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여기왕 토끼섬을 안보믄 을큰허여, 강방와사주~"

용기 없는 나에게 할아버지는 따뜻한 격려를 건넸고, 직접 안내까지 해주겠다고 했다. 보기에는 쉬워 보였지만, 바닷물길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만조 때면 길이 사라져 건널 수 없지만, 다행히도 이날은 간조.


바닷물은 배꼽까지 차올랐지만, 조심스레 발을 내디디며 한 걸음 한 걸음 물길을 헤쳐 섬을 향해 나아갔다. 이 모든 것이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가 선물해 준 행운이었다. 할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여느 해처럼 먼발치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다 돌아갔을 것이다. 드디어, 토끼섬의 하얀 백사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작지만 단정한 백사장을 품고, 그 옆으로 우뚝 솟은 10m 높이의 현무암이 보인다. 할아버지는 이 바위를 ‘할망당’이라 불렀다. 할망당은 해녀들이 모시는 신령한 곳이다. 할망당에 오르면 신이 노해 거센 바람이 분다고 하여, 오르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할망당 바위에도 문주란꽃이 하늘거리며 여름의 노래로 물들이고 있었다.


하얀 꽃잎들이 한여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돌담을 따라 문주란 군락지로 향했다. 바위 사이마다, 백사장 가장자리마다, 문주란이 하늘거리는 몸짓으로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식혀 주는 은은한 향이 가득했다.


문주란은 수선화과에 속하는 상록 다년생초. 때로는 1m 50cm까지 자라나고, 가느다란 꽃잎 여섯 장과 여섯 개의 수술, 그리고 한 개의 암술을 품고 있다. 파도를 타고 흘러온 씨앗이 이 섬에 닿아, 그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토끼섬의 문주란은 천연기념물 제19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돌담을 따라 한 바퀴 걸었다. 문주란 너머로 지미봉이 다가오고,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어우러지며 제주만의 풍광이 펼쳐졌다. 뭉게구름처럼 피어난 문주란이 섬을 온통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랫동안 품어온 그리움이 하얗게 꽃을 피운 듯했다.

keyword
월, 수,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