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흐르는 한라

영실계곡 물소리에 한라의 들꽃이 피어났다. 맑은 꽃들이 깊은 골짜기마다 퍼져 나간다. 소슬바람이 꽃잎을 스치고, 벌과 나비는 가을 숲에서 느린 춤을 춘다. 바위와 골짜기, 오름마다 보랏빛으로 번져 은은하게 물든다.


적송 숲길을 따라 걸으면 자연스레 사색에 잠긴다. 계곡물은 가을빛을 품고 조용히 흐른다. 시간만 흘러 보내는 것이 아니라, 숲의 언어와 바람, 나뭇잎 떨림까지 함께 품고 흐른다.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리를 닮은 '진범' 군락을 만난다. 꽃잎 날갯짓이 가을 숲을 부드럽게 흔들어 놓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시간의 흐름도 잊는다. 셔터를 누르며 계곡물 위에 찍히는 작은 발자국을 담아본다. 오리를 닮은 진범은 속치마를 부풀린 듯 살랑이며 물길을 지난다.

진범

돌계단을 오르는 순간, 안개가 발밑을 감싸며 밀려온다. 병풍바위를 휘감은 안개는 엷은 날개처럼 꽃잎을 스쳐간다. 바위틈에는 구름체꽃이 보랏빛으로 반짝인다. 꽃송이를 레이스처럼 감싸며 나풀거린 모습이 우아하다.

섬잔대

걸음을 따라 몇 걸음 더 오르면 맑은 종소리가 귀를 스친다. 오백나한 바위마다 부서지는 듯한 울림. 그곳에 섬잔대가 피어 있다. 가을 하늘보다도 맑은 울림을 바람에 실어 보내며 산을 깨운다. 그 소리 속에서 마음이 조금씩 비워지고 맑아진다. 가을의 기도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한라돌쩌귀

조금 더 오르면 투구를 쓴 전사처럼 늠름한 한라돌쩌귀가 서 있다. 가을 산을 지키는 전사 같은 꽃이다. 뒤이어 홍자색으로 곱게 물든 한라송이풀이 시야에 들어온다. 푸근하게 품을 열어주는 홍자빛이 길을 환하게 밝힌다.

좀향유&한라고들빼기

바위틈에는 때가 맞아야 만날 수 있는 작은 꽃, 깔끔좁쌀풀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너무 작아 지나치기 쉽지만, 그 고요한 꽃잎 하나에도 작은 우주가 깃들어 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보랏빛을 퍼뜨리는 좀향유가 불어오고, 어느 순간 햇살처럼 해맑은 한라고들빼기가 나타나 인사를 건넨다.


가을날, 한라산은 찬란한 빛으로 천천히 물들어 간다. 꽃들과의 만남 속에서 오르막의 숨 고르기조차 잊는다. 한라산의 가을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를 또 한 번 꽃의 품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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