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 나팔에 담은 계절

덩굴용담

봄이 오면, 양지바른 오름에서 가장 먼저 구슬봉이가 자그마한 나팔을 불어 올린다. 그 소리에 이끌리듯, 겨울잠에서 깨어난 큰구슬봉이도 조용히 나팔을 불기 시작한다. 갯마을에서 날아온 봄꽃 편지가 산허리를 타고 번져가며, 고산지대에도 서서히 봄소식이 피어난다.


5월이 되면 한라산 양지바른 곳에서도 하늘을 향해 흰그늘용담이 나팔을 분다. 그 맑고 투명한 소리에 한라산의 봄은 점점 무르익어 간다. 이어 구슬봉이와 닮은 고산구슬봉이가 흰그늘용담의 바통을 받아 여름으로 향하는 길을 연다.


가을이 시작되면, 새벽 공기를 가르며 또 다른 나팔소리가 들려온다. 덩굴용담이 가을을 알리는 나팔을 불어 올리면, 하늘빛을 가득 담은 용담꽃이 서서히 피어오르며 산길을 물들인다. 스산한 가을바람 속에서도 용담은 꿋꿋이 하늘을 향해 종처럼 꽃을 피운다.


용담 뿌리를 용의 쓸개처럼 쓰다 하여 ‘용담’이라 불린다. 쓰디쓴 뿌리를 지닌 이 식물은 약재로도 쓰일 만큼 유용하지만, 들꽃으로서의 가치 또한 빼어나다. 양지바른 오름에서 봄소식을 전하는 구슬봉이와 큰구슬봉이, 한라산에서 봄을 알리는 흰그늘용담과 고산구슬봉이, 가을이 깊어갈 즈음 피어나는 덩굴용담과 용담. 이 모두가 용담과에 속한 식물들이다. 그중에서도 덩굴용담은 누구보다 부지런히 아침을 여는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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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이면, 쨍한 햇살을 머금은 꽃을 담을 수는 없지만, 빗물을 머금은 싱그러운 모습은 청초하다. 비 오는 아침, 흐린 날씨에 늦잠을 자기가 일쑤지만, 덩굴용담은 이른 새벽부터 나팔을 불어 하루를 시작한다. 비가 오든 맑든, 아침이면 어김없이 피어나고, 오후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꽃잎을 꼭 다문다. 마치 연주가 끝난 나팔수처럼, 저녁이 되면 조용히 하루를 마감한다.


해가 뜨면 어김없이 나팔을 불어 올리는 덩굴용담. 그 고운 풀꽃은 부지런한 이만이 볼 수 있다. 나 역시 부지런한 편은 아니지만, 덩굴용담을 예쁘게 담고 싶은 마음에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다. 부슬비에 피어있는 덩굴용담이 그저 고맙다.


덩굴용담열매1.jpg 덩굴용담 열매

덩굴용담은 흰색 또는 연보랏빛으로 핀다. 덩굴성 식물이기에 나팔꽃처럼 다른 물체를 감으며 자란다. 많이 자라야 80cm 남짓. 가느다란 몸을 칭칭 감으며 오르려 애쓰지만, 키가 작은 탓에 나지막한 곳에서 하늘을 향해 나팔을 불어 올린다. 오후가 되면 연주는 끝이 난다. 덩굴용담은 꽃도 아름답지만, 꽃이 진 후 맺히는 자줏빛 열매 또한 탐스럽다. 작은 몸으로도 알찬 결실을 맺으며 가을을 닮아간다.


나팔꽃은 귀화식물이지만, 덩굴용담은 제주도와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우리 땅의 소중한 들꽃이다. 가을 하늘 아래, 나지막한 곳에서 부지런히 나팔을 불어 올리는 덩굴용담. 그 작은 꽃이 품은 계절의 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깊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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