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에 닻을 올리다

닻꽃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는 산등성이에 서면, 파란 하늘가로 훨훨 날아오르고 싶다. 소슬바람 한 줌을 손에 꼭 쥐어 본다. 그러나 바람은 손아귀를 벗어나 초록 이파리를 흔들어 깨우며, 팔랑이는 나비처럼 풀숲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내 풀잎 위로 벌렁 드러누워 잠시 쉼을 얻는 듯한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물결이다. 갈바람은 부드러운 깃털로 가을꽃을 어루만지며, 살며시 품에 안는다. 가을바람에 물매화꽃이 함초롬히 피어나고, 섬잔대의 은은한 종소리가 백록담 너머로 울려 퍼진다. 피고 지는 들꽃들 사이로 가을의 기도가 시작된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파란 하늘에 닻을 올려놓고 잠시 머물러 있는 듯한 닻꽃을 만난다. 가을이 시작되면 한라산의 오름에 닻꽃이 피어난다. 올해도 그 꽃을 만나기 위해 한라산으로 향했다. 헉헉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파란 하늘을 끌어당겨 본다. 소슬바람의 입맞춤에 풀숲이 살랑이고, 따사로운 가을볕에 산은 평온함으로 젖어든다. 가을햇살, 가을바람, 파란 하늘, 이 모든 것이 세상 어느 풍경보다 빛난다.


가을볕을 받으며, 파란 하늘 어딘가에 닻을 올려놓고 잠시 머무는 닻꽃을 찾는다. 그러나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특별히 화려하지도, 키도 크지 않아 풀숲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꽃은 신기하게도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살며시 속삭인다. 그 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숙이면, 햇살을 머금은 닻꽃 한 송이가 시야에 들어온다.


가을 하늘은 때로 널따란 푸른 바다가 되고, 드넓은 벌판이 된다. 그 하늘에 닻을 올리고 닻꽃처럼 잠시 가을날에 머물러도 좋겠다. 풀숲을 밟는 발자국마다 향기로운 한라산. 봄이면 화려한 꽃밭으로 물들이고, 여름이면 백리향 향기로 가득 채워지는 산. 가을이 되면, 이 아름다운 한라산이 바다로 떠내려갈까 봐, 하늘에 닻을 올려놓았나 보다.


닻꽃은 오름 정상, 양지바른 곳에 피어난다. 하늘을 배경으로 닻꽃을 담아보면, 마치 하늘에 닻을 올려놓은 듯하다. 황록색 꽃잎 네 장이 소담스레 피어난다. 뾰족뾰족 가시처럼 뻗어나간 꽃부리가 닻을 닮았다. 벌과 나비들은 달콤한 꿀을 찾아 꽃대롱에 입을 집어넣는다. 꽃잎 안을 들여다보면, 그 안쪽에는 연노란 작은 꽃이 숨어있다. 네 개의 수술과 두 갈래로 갈라진 암술머리가 마치 꽃잎 속에 숨겨진 보석 같다.


닻꽃이 질 무렵이면, 꽃잎이 단풍처럼 붉게 물든다. 가을 하늘에 올려놓았던 닻을 서서히 내리며, 계절은 그렇게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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