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오름의 꽃물결

늦가을은 은빛 지느러미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계절이다. 들판은 억새꽃의 춤사위로 출렁이며 깊어가는 계절을 노래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순간일 것이다. 바람의 결을 손끝으로 느끼고, 햇살이 억새꽃마다 입 맞추듯 스며드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 매서운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서 있는 법을 배우는 일.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것이 좋은가 보다. 땅거미가 내려앉아도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은빛 지느러미가 펄떡이는 들판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에 차를 세우고, 억새의 숨결을 조용히 담는다.

가는층층잔대.jpg 층층잔대

가을이 가기 전에, 들꽃 속에 파묻혀 살짝 미소 짓고도 싶었다. 그러나 향기 속으로 한걸음 스밀수록 그것은 금세 바람에 흩날리고, 더 깊이 들이마시고 싶은 갈증만 커진다. 그래서 꽃도 마음껏 보고 억새도 실컷 마주할 수 있는 오름으로 향했다. 해마다 가을이면 이곳은 보랏빛으로 소담히 물든다. 아기 무덤가마다 작은 꽃들이 피어 그 영혼을 달래듯 바람에 흔들린다. 이곳의 꽃들은 아기천사를 위해 피어난 듯하다. 작은 키, 천진한 웃음 같은 꽃송이들. 눈부시게 시린 아름다움이다. 보랏빛 꽃향유가 앞다투어 피어나고, 그 사이로 개쑥부쟁이가 하늘거리며 춤춘다. 층층잔대, 고사리삼, 자주쓴풀… 들꽃들의 속삭임이 청아하게 울린다.

고사리삼5.jpg 고사리삼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운 표정이다. 청자빛처럼 은은하게 퍼지는 생명의 빛, 때로는 죽은 자의 눈물처럼 시린 빛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아기 무덤에 핀 작은 고사리삼은 한 뼘도 되지 않는 몸짓으로 샛노란 포자를 익힌다. 곧 황금빛 희망으로 가득 차겠지. 그리고 그 희망은 대지의 입맞춤을 받아 다시 싹을 틔울 것이다.

자주쓴풀7.jpg 자주쓴풀

아기의 영혼을 닮은 작은 꽃이 피었다. 시린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외로운 듯, 서러운 듯 한없이 애처롭다. 아장아장 오름 자락을 비비며 조용히 싹을 틔운 존재. 황금빛을 받아 꽃잎을 여는 자주쓴풀. 그 모습이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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