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꽃이 손짓하는 계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떠나지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김재규 시인의 '가을의 노래'처럼, 가을이 오면 문득 떠나고 싶어진다. 그러나 정작 떠나지 않아도 가을은 황혼마다 다정하게 되돌아와, 마음 한쪽을 텅 빈 듯 허전하게 흔들어 놓는다.


들녘 한가운데 서서 쓸쓸히 노래하는 은빛 억새처럼, 가끔은 하얗게 울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황혼이 물들기 시작하면 가을은 부드러운 음색으로 사르르 녹아내릴 듯 바람에 실려 속울음을 삼킨다. 그렇게 참고 참다가 끝내 토해내는 억새꽃의 하얀 눈물, 그 모습이 어쩐지 처연하기만 하다. 억새는 제주를 닮았다.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를 깊이 내리고, 바람 거센 섬 제주에서 강인하게 살아가는 억척스러움. 그 속울음을 삼키며 묵묵히 세월을 견디던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꼭 빼닮았다.


가을이면 제주 사람들은 ‘어욱(억새의 제주어)’을 베어다 겨울 땔감으로도 쓰고, 볏짚 대신 지붕을 덮는 이엉으로도 사용했다. 억새가 갓 봉오리를 맺을 때면 ‘어욱삥이’라 하여 뽑아 먹던 기억도 있다. 그 시절, 먹을거리가 흔치 않던 때, 억새는 제주의 땅에서 들풀이자 간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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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는 제주의 가을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머무는 곳마다 하얀 손을 흔들며 "어서 오세요." 반겨주는 꽃. 제주의 가을은 억새꽃으로 인해 더욱 깊어진다. 한라산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는 참억새, 금빛으로 반짝이는 금억새, 물가에서 자라나는 물억새까지. 저마다의 자리에서 피어나, 제주의 들녘을 은빛으로 물들인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가을날, 끝없이 일렁이는 은빛 출렁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주의 가을을 예찬하듯, 하얀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억새꽃 속에서 그 계절의 풍경이 되어 마냥 걸어보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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