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쓴풀
가을이 깊어 갈수록 하염없이 울고 있는 풀꽃이 있다. 강인했던 풀꽃도 계절이 깊어질수록 서글픈 눈물을 흘린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한 장에도, 흐느적거리는 풀잎의 노랫소리에도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오는 날, 자주쓴풀은 보랏빛 눈물을 머금고 있다.
저물어가는 계절의 끝에서 찬 서리에 몸을 맡긴 채 꿈꾸는 너는 알겠지. 저물녘 볕이라도 스며드는 날이면
행복한 웃음소리로 가득할 거라는 걸. 오름마다 보랏빛 꿈으로 피어나는 너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미소 지으며 이야기하겠지. 풀숲에 가려 가슴이 뭉개져도, 그 속에서 더욱 짙은 빛으로 피어나는 너는 알 거야.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라는 걸.
쓴 꽃의 계절
자주쓴풀은 용담과의 두해살이풀이다. 이름처럼 쓴맛을 품고 있다. 쓴풀 종류로는 고산지대에 피는 네귀쓴풀,
습지를 좋아하는 개쓴풀, 그리고 찬 서리를 맞으며 피어나는 자주쓴풀이 있다.
제주의 여름, 한라산에서 만나는 네귀쓴풀은 네 장의 하얀 꽃잎에 파란 점들이 찍혀 있다. 꽃잎에는 작은 단춧구멍 같은 귀를 지니고 있어 '네귀쓴풀'이라 불린다. 가을이 시작되면 개쓴풀이 핀다. 양지바른 습지에 자리를 잡은 개쓴풀은 꽃잎 안에 하얀 샘털을 수북이 품고 있다. 보드라운 개쓴풀은 가을바람에 몸을 맡긴 채 묵묵히 계절을 견뎌낸다. 그러다 단풍이 물들고 찬 서리가 내릴 즈음, 양지바른 오름에는 자주쓴풀이 피어나 가을의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
보랏빛 눈물로 피어나는 꽃
자주쓴풀의 다섯 장 꽃잎 안에는 자줏빛 샘털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꽃잎 속으로 스며든 보랏빛 눈물은
핏줄처럼 흐르며, 그 깊은 아픔을 말해준다. 말 못 할 설움이 꽃잎 속에 스며들어도, 자주쓴풀은 이렇게 속삭인다.
"나는 괜찮아. 이렇게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거야."
가을이 깊어질수록 더욱 짙어지는 보랏빛 꽃송이. 그 꽃은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도, 찬 이슬이 내리는 아침에도, 변함없이 오름 등성에 피어나 맑고 푸른 가을하늘을 바라본다.
가을하늘이 유난히 아름다운 것은, 그 하늘처럼 맑고 청아해지기를 바라는 들꽃들의 소망이 모여 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