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한라산, 레몬 향기 머금은 매발톱꽃이 피어날 때면 마음이 먼저 산으로 달려가곤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핑계로 하루 이틀 산행을 미루다 보니, 어느덧 한 주가 흘렀다. 꽃이 기다려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조바심이 들자, 늦게라도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가벼운 배낭에는 물 한 병과 바나나 두 개만 챙겼다. 발걸음도 가볍고 싶었다. 관음사 야영장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35분. 매표소 직원이 어디까지 갈 거냐고 묻는다. "용진각 계곡까지만 다녀오겠습니다." 대답을 마치고 서둘러 산길로 접어들었다.
관음사에서 백록담까지는 8.7km, 보통 5시간이 걸린다. 정상까지는 오를 생각이 없다. 오늘의 목표는 6.8km 지점, 용진각 계곡. 왕복 5시간이면 충분하지만, 꽃을 만나면 시간은 금세 흐르고, 하루가 모자란다. 마음으로는 24시간이 아쉬운 산행이다.
늦게 오르기 시작한 만큼 시간 관리가 중요하다.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하산해야 한다. 렌턴도 챙기지 않았으니 더더욱 서둘러야 한다. 평일의 산길은 한적하고, 깊은 숲 속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놓인 듯했지만,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푸른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산바람이 성급한 마음을 다독인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걷는다. 삼각봉까지는 눈에 띄는 꽃이 많지 않다. 그저 가끔 호자덩굴과 눈을 맞추며 초록이 짙어진 숲을 즐길 뿐이다. 삼각봉까지는 적어도 오후 2시까지 도착해야 한다. 꽃과 마주할 시간을 넉넉히 가지려면.
빠르게 걸음을 옮겨 삼각봉에 도착하니 1시 50분. 그리고 그곳에 매발톱꽃이 피어 있다. 고맙고도 반가운 꽃. 살며시 코끝을 스치는 레몬 향이 기억 속을 어루만진다. 다시금 코를 가까이 대어 향기를 들이마신다. 이 향기를 맡으면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매발톱의 꽃말은 용맹스러운 매의 발톱을 닮아'승리의 맹세'다. 꽃은 단정하면서도 강인한 기품을 품고 있다. 큼지막한 꽃잎, 화사한 색감, 사진 속에서도 빛나는 꽃.
꽃잎 뒤쪽, 네 개의 뿔 모양은 ‘꽃뿔’이라 부른다. 예쁜 이름처럼 모양도 귀엽다. 그 안에는 달콤한 꿀이 담겨 있다. 꽃잎이 아니라 꽃받침처럼 보이는 겉잎이, 안쪽으로 말려들어간 진짜 꽃잎을 감싼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작은 노란 꽃술이 숨어 있다.
한라산에서는 유월 중순부터 매발톱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가지 끝에 매달린 꽃송이는 하나같이 아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고개 숙인 꽃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렌즈를 들이댄다.
어느새 공군사관생도들이 하산을 시작한다. 한적했던 산길이 북적인다. 더 오래 머물고 싶지만, 매발톱꽃과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돌린다.
용진각 계곡으로 향하는 길, 마음속에는 여전히 매발톱꽃의 레몬 향기가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