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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것 뭐에요?

1. 사랑의 방식

by 해인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무형의 무언가를 믿는 것은 저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믿음, 사랑, 우정, 선함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것들을 항상 유형의 무언가로 가져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서요. 그덕에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 실체가 이전보다는 선명해지고 있지만 아직도 철썩같이 믿는 건 쉽지 않네요.

제가 좋아하는 장면인데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나름대로 부단히 형체를 만들어 둔 사랑에 대해 적어보려합니다.

1- 사랑의 방식

두꺼운 사진첩 속 장면들만 드문드문 기억나는 유년 시절로 거슬러가봅니다. 탯줄의 온기가 따끈히 남은채로 첫 애착대상인 엄마를 만납니다. 내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와 아빠를 보며 사랑에 대해 이해합니다. 내가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도와주고, 나를 보며 웃어주고 먹여주고 재워줍니다. 내가 불편해서 좀만 찡찡거려도 놀라 달려와서 나를 바삐 도와줍니다. 내게 생긴 다양한 욕구들을 족족 채워주는 엄마가 너무 좋고 떨어지기 싫어지죠.

시간이 흘러 친구들을 만나고, 교육을 받으며 자아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처음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 되면 좋을지, 어떤 친구를 만나서 어떻게 놀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돌이켜보면 그 즈음에 하고싶은 게 제일 많았던 것 같네요, 그때 부모님에게 반항도해보고 내 의견을 강하게 주장해보기도 하면서 건강한 자존감을 쌓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가족 일원들과 상호작용을 주고 받고 관찰하며 사랑을 머리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가령,

엄마는 아빠를 사랑한다.

엄마는 아빠에게 사과를 깎아준다.

사과를 깎아주는 것은 사랑이구나.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

엄마는 내가 갖고싶은 것을 물어본다.

갖고싶은 것을 물어보는 것은 사랑이구나.

아빠는 나를 사랑한다.

아빠는 내가 원하던 발레학원에 가보라며 응원해준다.

내가 원하는 일을 응원하는 것은 사랑이구나.

와 같은 방식으로요

대전제는 틀릴리가 없어요. 왜냐면 전제가 틀리다는 건 작은 아이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마음이 아프고 말고를 떠나 첫 애착대상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아이는 어떠한 대입이 와도 그저 스펀지처럼 모두 흡수해버리고 맙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가끔은 숨막히게 느껴지기도 하는 건 그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사랑의 방식은 그걸 거스르려는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받은 사랑의 방식대로 나는 사랑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내가 배운 사랑은 그게 전부거든요.

쉽게 말하면, 부모님의 잔소리와 관심을 일상처럼 들은 딸은 관심있는 남자한테도 잔소리를 합니다. 방관과 무관심을 경험한 아들은 아내가 다그치기 시작하면 회피부터 합니다. 또, 막연한 기대와 무조건적인 부둥부둥을 경험한 마마보이는 아내가 조금만 현실적인 조언을 해도 발끈해요.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초등학교 때 처음 친구집에 놀러가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가족의 형태와 분위기는 매우 다양하더라고요. 성장 환경은 얼추 비슷할 수 있지만 사소한 것들까지 꺼내면 놀라울만큼 달라요. 아무렴, 같은 집에 사는 형제, 자매들과 얘기를 해보면 각자가 겪은 사랑의 방식도 다를거에요. 나의 무의식에 쌓인 사랑의 경험들은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는 유일무이한 것이었던거죠.

우리는 불현듯, 진짜 날 사랑하긴 하는 건가? 하는 뿌리부터 흔들리는 불안감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사랑을 행하는 방식이 다르진 않았을지 대화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 방식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요소들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니 한 번쯤은 사랑의 방식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지해보는 거에요.

혹여나, 내가 갖게 된 기준으로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든다면 사랑의 방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볼 수도 있죠.

애착 대상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과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는 어떤 방식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답을 논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그저 퍼즐처럼 서로가 딱 맞기만 하면 되는거죠. 그러나 맞는 대상을 찾지 못한 채로 욱여넣다보면 폭력이 될 수 있기에 꽤 신중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

이런 것들을 깨닫고 나니, 가정 폭력을 행하고 뒤틀린 애착을 보이는 사람을 보면 그의 유년시절이 불우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질이나 건강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물려받는 게 차라리 나았을 텐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거든요.

하지만 첫 애착대상에게 원치않는 방식의 사랑을 받았더라도 성장 과정에서 좋은 어른과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어 그 정의를 새롭게 정립한다면 더 나은 사랑의 방식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과정에서 본인의 노력도 당연히 필요하고요.

여러분도 한 번쯤은 사랑을 돌아보길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씁니다.

다음에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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