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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Jun 29. 2022

삶의 의미를 찾느라 삶을 낭비하다

싫은 일은 죽어도 안 하고, 범사에 감사와 만족이 없고, 충동적이고 싫증을 잘 내고, 터 잡고 사는 것이 싫은 사회 부적응적인 기질은 김 씨의 직장 역사상 가장 빠른 자발적 명예퇴직자로 이어졌다. 퇴직하는 날 김 씨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에게 1년의 시간을 주려고 해. 다음 계획을 세우지도 않을 것이고, 어떤 의무감이나 타인의 시선도 무시할 것이며, 평생 처음 잠들기 전에 내일 일을 생각하거나 눈 뜨면서 오늘 할 일을 확인하는 따위의 짓거리는 적어도 앞으로 1년 동안은 없을 거야."


시간의 속도가 그렇게 빠른 지 몰랐다. 1년의 자유를 허락한 것은, 그즈음이면 난 당연히 다음 인생을 기획하고 있었을 것이라 믿었다. 늘 남들이 놀라는 새로운 일들을 저지르면서 살아왔으니까. 그러나, 자신했던 1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태동도 없었다. 그저 미친 듯이 책을 읽고, 품위 있는 클래식이 아닌 재즈와 탱고 따위의 속된 음악을 듣고, 운동을 하고, 불온한 사상들을 읽고, 정원을 가꾸고, 나의 사랑 Paris에 다녀오고, 그때까지는 꽤 많았던 팬들의 전화와 방문을 즐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책도 멀리하고 운동도 게을러지고 정원은 밀림이 되고, 코로나 덕분에 비행기 타고 떠나는 여행은커녕 집을 벗어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팬들은 떠나가고 결국 나는 혼자가 되었다. 비로소 당황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챕터가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가는 것인가.


은퇴하면서 나 자신에게 1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을 자유를 자신 있게 허락한 것은 그렇게 살다 보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삶이 지루하다 여길 때마다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렀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그런 패턴이 반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1년은 너무 빨랐거나 짧았다. 책도 많이 읽었고, 너무 늙어 되지도 않은 피아노도 배웠고, 여행도 했고, 빈둥거림을 즐기기도 했는데, 막상 허락된 1년이 지났음에도 이젠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1년을 더 허락했다. 아직은 남은 시간이 충분했으니까.


같은 날들이 반복되었다. 책 읽고, 헬스 하고, 영화 보고, 피아노 배우고, 기타도 치고, 강아지들 키우고, 작은 마당을 꽃나무들로 채워보고, 그 예쁜 마당에서 바비큐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지만 또 허락된 시간이 다 소진되었음에도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조금씩 초초하고 당황스러워졌다. 2년이면 충분하고도 남아야 하는데, 왜 답을 찾지 못했을까. 난 늘 3분 안에 결정을 해왔다. 그리고 그 결정이 크게 잘못된 적도 거의 없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새로운 일들을 벌리곤 했다. 그런데 왜, 2년이란 너무 긴 시간을 허락했음에도, 아무 일도 저지르지도, 아니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는 걸까.


의미. 이 일이 의미 있는 것일까. 그런 고민이었다. 젊은 날에는 의미를 따지는 따위의 고민 없이 쉽게 일을 저질렀다. 그것은, 젊은 시절에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었고, 더욱이 아직 남은 시간들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충동적 행동이 실패해도 만회하거나 혹은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아직 실패하지 않은 일들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인생의 마지막 챕터이다. 잘못된 선택을 만회하거나 새로운 선택으로 대체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삶의 마지막 단계가 의미 있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 챕터는, 이제는 남은 시간이 없으니, 가장 필연적인 의미로 채워져야 한다는 강박이다. 얼마 남지 않은 내 삶을 의미 없는 일을 하다가 의미 없이 끝내면 안 된다는 초초함이었다.


절대적인 의미를 찾으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 어떤 일도 내 인생의 마지막 챕터를 완벽하게 만들 거란 확신이 없음은 너무 당연하다. 아. 의미를 찾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의미를 포기함이 옳지 않은가. 내 삶의 마지막 챕터는 한순간이 아니지 않은가. 순간의 최선과 매일의 감사 따위의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작은 의미들이 중요함은 알 것 같았다. 작은 목표, 작은 노력, 그리고 작은 만족들. 어차피 단 하나의 최선의 정답을 찾아내어 그대로 사는 것은 허황된 꿈이라면, 차라리 작은 목표와 작은 성취와 작은 만족들, 그래서 작은 삶의 의미들을 쌓아가는 것이 차선의 정답이다.


매일 고민만 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최선이란 확신이 들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생의 마지막 날들을 의미 없는 것들을 하느라 낭비하면 안 된다는 강박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의미를 찾으니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의미 없는 삶이 오래 지속됐다. 그러니 의미를 찾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니까, 거창한 하나의 정답을 찾는 일을 포기해야겠다는 말이다. 그 대신, 몇 가지 조금 부끄러운 목표를 정한다. 낮잠을 자지 말자. TV는 최소 선택이다. 강아지 돌보는 일에 더 진심을 다한다. 매일 삼십 분 이상 무작정 걷는다. 피아노 치면서 노래할 수 있도록 다섯 곡을 연습한다. 기타 치며 노래할 수 있도록 다섯 곡을 연습한다. 하루 한 시간 이상 책을 읽는다. 매일 일기든지 단상이든지 글을 쓴다. 늙고 병든 엄마를 돌보는 일에 감사한다. 홍콩 느와루든지 감동적인 할리우드 영화든지 좋은 영화를 본다.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건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만이다. 그러나 삶은 주어진 것 아니던가. 사람은 모두 각자 다른 삶을 부여받았고, 그저 그 주어진 삶에 순응하고 잘 버텨내는 것이 우리네 인간의 의무일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내가 찾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삶에 얼마나 잘 순응하여 그 운명을 얼마나 행복한 것으로 만드느냐에 달려있다. 존재하지 않는 삶의 거대한 의미를 찾느라 남은 짧은 삶을 허비하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 아쉬워도 그것이 차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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