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씨 Jun 30. 2022

About 블루

블루. 2019년 11월 생. 러시안 블루. 남자. 2021년 10월 13일 무지개다리를 건너다.


세상이 달라졌다. 어릴 때, 집에는 늘 강아지들이 있었다. 새끼를 낳기도 하고 집을 나가 없어지기도 했다. 개장수가 잡아가서 먹기했다. 고등학교 때인가. 마당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집에서 태어난 새끼 강아지가 연못에 빠져 꺼내준 기억도 있다. 그 땐 우리가 먹다 남은 음식을 먹였다. 병원에 가는 일도 없었고 예쁘게 털을 손질해 주거나  발톱을 깍아주거나 귀를 청소해주는 도 없었다. 몰랐다. 그래서 쉽게 아팠고, 일찍 죽었고, 가끔 잡혀 먹었다.


고양이를 키우는 집은 없었다. 강아지는 사람을 따르지만 고양이는 정이 없다든지 요물이라든지, 어쨌든 고양이를 키운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런에 요즘은 고양이가 대세인 것 같다.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 전 반려묘의 수가 반려견의 수를 넘어섰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우리나라도 그렇게 된 것 같다. 개냥이. 요즘 고양이는 강아지처럼 사람을 따르고 애교가 많다니 세월이 고양이의 성품을 바꾸었단 말인가.


강아지 두마리가 있었지만 갑자기 고양이를 키워보고 싶었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냐는 나의 상투적인 무기를 이용하여 죽기 전에 고양이를 키워보기로 했다. 고양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인터넷으로 공부를 했다. 고양이 종류, 성격, 강아지와 다른 점, 사료, 장난감, 등등. 내 마음 속 선택은 벵갈이었다. 표범같은 자태에 그냥 매료된 것이다. 그리고 러시안 블루와 샴도 후보였다. 착한 개냥이들이라니까.나도 좋은 일을 하고 싶어서 유기묘를 알아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핑계일까. 서울이나 부산같은 큰 도시라면 좀 더 좋은 선택이 많았겠지만 시골의 작은 도시에선 여의치 않았다. 이런 핑계를 삼아 동네의 애견샾을 선택했다. 애견샾들은 몰려있었다. 일단 둘러보고자 했고, 한 작고 허름한 곳에서 운명이 결정됬다.그 집에는 마침 벵갈이 있었다. "고양이 처음 키우시나요? 그럼 벵갈이 쉽지 않을 수 있으니 러시안블루가 좋을 것 같아요." 마침 두 달 된 러시안블루가 있었으니 그것은 운명이었다. 이미 나의 선택에 있었던 종인지라 너무 빨리 쉽게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블루와 운명으로 만났던 것이다.


첫날, 밥과 물을 놓아두었지만 블루는 내 옷장 구석에서 나오질 않는다. 난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적응이 필요하니까. 하루 이틀 지나면 적응할 거라는 애견샾 주인의 말은 틀렸다. 겨우 몇시간이 흘렸을까. 블루는 서서히 집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날 밤 블루는 침대에 올라와 이불 속에서 나와 함께 잠을 잤다. 아, 이런 행복인가.


"이름이 뭐죠?" " 블루입니다." "러시안 블루는 죄다 블루, 블루블루, 블루베리네." 처음 데리고 간 동네 동물병원의 수의사가 말한다. "아, 그럼 이름을 바꿀까요?" " 놔두세요, 집에서는 어차피 블루가 혼잔데요 뭐."


고양이를 처음 키우려니 놀라는 일이 많다. 강아지가 하지 않는 짓들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발을 책상에 올리고 의자를 눞힌 자세로 책을 읽는다. 아이구 깜짝이야. 어느새 블루가 무릎에 앉아서 나를 눈 똥그랗게 쳐다보고 있는게 아닌가. 혹은, 어느새 어깨에 앉아있다. 분명 거실에서 블루를 보고는 침대에 누웠는데, 블루는 이미 이불 속에 와 있었다. 이런 것들. 고양이는 소리내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을, 그것도 매우 빠르게, 처음 알았다.


보리는 블루보다 일곱달 어린 장모치와와다. 블루가 처음 집에 왔을 때는 아직 애기였으니까 엄마품이 그리웠을 것이다. 큰 누이 타샤한테 어리광을 부려보지만 타샤는 전혀 받아주지 않고 피하기만 할 뿐이다. 열두살이 넘은 두리가 있었지만, 두리는 심장병으로 아팠고 그래서인지 치근대는 블루가 싫고 화를 낼 뿐이었다. 그래서 블루는 외로웠을거다. 그러다가 어린 보리가 나타나자 블루는 그 동안 주지 못하고 받지 못했던 애정을 보리에게 쏟는다. 마치 엄마처럼, 보리의 얼굴과 목과 귀를 그루밍해준다. 그리고 보리도 블루를 너무 좋아하고 따랐다. 같이 장난치고 같이 우다다하고 같이 기대서 잠들고 언제나 같이 있다. 그건 블루가 너무 착해서 보리의 모든 것을 다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죽고 못하는 사이. 두 아이들은 같이 있어 너무 행복했고 나도그랬다.


블루의 죽음은 너무나도 어이없고 슬프다. 블루와 보리는 한 달에 한 번 동네 병원에 간다. 심장사상충 약을 목 뒤에 바르고, 발톱을 깍고, 귀를 청소하고, 털을 다듬고, 이런 저런 체크를 하는 것이다. 주 목적은 심장사상충 약이며, 내가 집에서 발라줄 수도 있지만, 그 김에 아이들 상태를 체크하는 목적이 더 크다. 두 아이를 같이 케이지에 넣어 병원에 간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이렇게 친한 걸 보면서 수의사도, 그리고 병원에 온 다른 손님들도 놀란다. 둘이 너무 귀엽다면서.


월요일. 여느때처럼 두 놈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다. 그런데, 블루가 이상했다. 꺽꺽 소리를 내며 토했다. 고양이는 잘 토하니까 나는 그저 무슨 플라스틱 조각같은 걸 먹었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침대 밑을 보니 먹은 물을 죄다 토해놓은 것이 아닌가. 병원에 전화했더니 의사는 "뭐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좀 더 두고보죠"라고. 그 때 바로 큰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고 조치를 했어야 했다. 늘 후회는 너무 늦다.


고양이는 아프면 구석에 들어가서 가만히 있는다. 소위 말하는 식빵자세로. 그건 편하지 않다는 의미다. 아침에는 밥을 잘 먹었는데 저녁도 굶고 다음 날 아침도 굶었다. 좋아하는 간식을 주어도 먹지를 않는다. 그때 큰 병원에 데리고 갔어야 다. 그럼 달라졌을까. 오후에 동네 병원에 데리고 갔다. 의사는 그냥 구토방지 주사만 놓아주고 내일까지 두고 보잔다. 내일도 안 좋으면 큰 병원에 가보라고. 그날 저녁도 굶었다. 세끼를 굶은거다. 그리고 또 토했고 구석에 힘없이 누워있다. 난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진정 사랑한 건 아니었다. 말 못하는 짐승들의 아픔에 민감해야 했고 신속히 조치를 취해야 했는데, 너무 안이했으니, 그건 사랑이 아닌거다.


다음 날 새벽. 6시 반에 아이들 밥을 먹으니 그 때 일어난다. 그런데, 타샤와 보리는 밥을 먹는데, 블루가 보이지 않는다. 거실에 힘없이 누워있다. 이미 호흡이 빨랐고 몸에 힘이 없다. 대도시가 아닌지라 24시간 운영하는 동물병원이 없다. 있었어도 가능성이 있었을까. 살 수 있었을까. 블루 품안아 배를, 팔다리를, 몸을 쓸어준다. 블루, 죽으면 안되. 주사기로 물을 먹여보았지만 그냥 흘려낼 뿐이다. 이미 블루의 죽음을 알았다. 마지막이란 것을.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심장사상충 약은 독하다. 모기를 죽이는 살충제 성분이 있으니까. 그래서 핥지 못하게 목 뒤에 발라주는 것이다. 이제야 알았지만, 그래도 만약을 방지하려고 목카라를 해주기도 하는거였다. 블루가 자기 뒷 목의 약을 핥을 수는 없었지만,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보리를 핥아주다가 보리 뒷목에 바른 약을 먹었던 것이다. 몇시간 지나면 흡수되고 말라서 괜찮은건데, 두 아이를 한 이동장에 넣어 집에 오는 동안, 그 동안 착한 블루가 보리를 사랑스레 핥아준 것이고, 그게 블루의 죽음이었다. 블루의 불운은, 보리를 너무 예뻐했던 것이고, 고양이 약보다 강아지 약이 더 독했던 것이다. 운명인가.


난 늘 아이들의 죽음에 불안해했다. 지난 5년 동안 세 아이를 보냈다. 첫 아이는 선천적 콩팥장애로 두 살 반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불안은 그 때부터 생긴 것 같다. 두번 째 아이는, 파양당해 키우게 된 아이인데, 이미 노견에 들어서서 내게 왔고 5년을 키웠는데 심장에 문제기 생겨 1년 이상 치료하고 투병하다가 하늘로 떠났다. 그리고 블루. 다음 달이 두 살이다. 아픈 데도 없이 너무 건강했는데, 아무도 생각도 못한 사고를 당해 죽었다.


짐승의 죽음이 주는 슬픔은 사람의 죽음과 다르다. 그 아이들은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물었단다. 그 아이들이 말 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제일 듣고 싶으냐고. "사랑해요"가 아니다. “나 아파요”였다. 이리도 공감될 수가 없다. 본능이라던가. 야생에서 짐승들은 아프다는 것이 드러나면 더 쉽게 잡아먹힐 수 있으니 표현하지 않는다고. 아니면, 아픔과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인간들처럼 엄살떨고 요란떨고 과장하지 않는걸까.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고통이 아프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으랴. 그저,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인간보다 더 깊은 것이다. 아프다고 좀 일찍 말만 해주었더라면.


없으면 안다. 얼마나 내게 소중하고 내가 의지하고 날 사랑해주었는지를. 블루를 찍었던 사진들을 보면서 운다. 죽어가는 블루를 안고 쓰다듬으면 울었다. 장례식장에 데리고 가서 염하면서 울었다. 화장하고 남은 뼈들을 보고 울었다. 암이나 아픈 부분은 검게 남는다는 말을 듣고 또 울었다. 하얀 뼈들과 재. 그러나 위장은 검게 남았다. 독한 약을 먹고 목과 위와 장이 다 검게 변했음을 확인하니 가슴이 막힌다. 그렇게 사랑했던 보리를 핥아준 것 뿐인데.


택배가 왔다. 블루가 건강해지길 바라면서 주문했던 유산균. 그리고 내일을 블루를 즐겁해 해 주려고 산 터널 숨숨집이 올 것이다. 블루. 미안하구나. 내가 더 일찍 치료해주지 못해서. 너무 무지해서. 블루는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크게 소리내  울었다. 많이 아팠던거다. 그렇게 크게 운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고통스런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가슴이 저미도록 크게, 고통스럽게, 울었다. 그리고 블루는 죽었다.


거실에 있으면 블루가 소리없이 걸어온다. 탁자에 올라와 얼굴을 가까이 대곤 그 예쁜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리곤, 작은 소리로 운다. 말한다. 배고프다고. 강아지들의 흔적은 바닥뿐이지만, 고양이는 바닥에도, 책상에도, 그리고 옷장 위에도 있다. 3차원이다. 내려다 볼 때도 있고 마주 볼 때도 있고 올려다 볼 때도 있다. 그럼 블루는 나를 올려다 보고, 마주 보고, 내려다 본다.


고양이는 사람하고 감정의 색깔이 가장 가깝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었다. 블루가 떠나고 보니, 사람한테도 강아지들한테도 받지 못했던 위로와 평안을 내게 주었던 것을 알겠다. 결코 요란 떨지 않는다. 조용히 다가와선 눈을 맞추고, 때론 얼굴을 론 엉덩이를 슬쩍 내 몸에 댈 뿐이다. 캣타워 위에서, 창틀 위해서, 혹은 계단 위에서 날 쳐다봐준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TV를 보다가 불연듯 고개를 들어보면, 블루가 멀리서 나를 봐주고 있었다.


"여보. 블루하고 같은 애 데려오고 싶은데 어때?"  아내는 화를 내며 반대한다. "난 고양이 싫어. 어디든 올라가니까 음식도 먹고 이것저것 건드리고." " 안그래. 그리고 어차피 내가 키우잖아."  데려오면 가족인데 엄마한테 사랑받지 못하고 구박받을 것이 싫다. 아내하고 싸우는 것도 싫고, "블루는, 타샤나 보리가 주지 못하는 감정적 위로를 줘. 당신은 모르겠지만."  아내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싫다는 것뿐이다. 내가 얼마나 마음 아픈지를 이해할 생각은 아예 없다. "당신이 좀 덜 힘들어진다면 그렇게 해." 혹은, 내가 말하지 전에, "블루하고 같은 애 데려오는 건 어때." 이렇게 말해주면 좋으련만. 가능성 없는 기대와 그런 기대가 무너지는 것에 대해 섭섭해하고 화내는 것은 나의 잘못이지만, 그렇다.


모든 만남은 운명이다, 별이, 타샤, 두리, 블루, 그리고 보리. 모든 이별도 운명이다. 별이, 두리, 그리고 블루. 지난 다섯 해 동안 세 아이와 이별했다. 아이들을 만났던 행복이 운명이니 헤어지는 슬픔도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종종 운명을 선택할 수 있지만, 짐승들은 그저 선택당하는 외에 할 수 있는게 없다. 그렇다면 아이들과의 만남은 그들의 운명이라기 보다 나의 운명인가. 나는 그 만남을 거절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다. 아이들의 운명을 내가 정했으니 그 운명을 행복으로 만들어줄 책임이 내게 있다.


아이들은 절대적 무능력자이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방에 같혀 나갈 수 없다. 밥을 주지 않으면 스스로 사냥을 해서 끼니를 때울 수 없다. 물을 주지 않으면 죽을 것이고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면 아파 죽는다. 눈을 스스로 뗄 수 없고 발톱이 자라도 스스로 깍을 수 없다. 치석이 끼어 치주염에 걸리고 이빨이 빠지는 것도 막을 수 없다. 밖에 나가 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 올 수도 없다. 절대적 무능력 존재들을 내가 선택했다면 그들의 운명이 불행한 것이 되지 않도록 먹이고 돌보고 치료하고 사랑해줄 책임은 내게 있다.


그런데, 내가 아이들이 살아가도록 모든 것을 해 준 것 같았는데, 정작 나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그 아이들이었다. 감정의 교감과 위로, 고독과 우울의 치유, 생명의 이해, 감사와 웃음, 그리고 가슴아픔과 눈물까지도. 그 아이들이 내게 주는 선물들이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난 메마르고, 아프고, 우울하고, 무감각하고, 무책임하고, 울지도 웃지도 않을 것이고, 허무했을 것이다. 가슴이 조이고 그래서 한 숨을 쉬게 된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해도, 블루의 모습만 떠오른다. 그 동안 그렇게 많은 기억들이 있었는지 몰랐다. 겨우 두 살이란 짧은 시간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기억이 너무 많았다. 이렇게 잔상이 진하게 남을 줄 몰랐다. 내가 블루를 잊고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 블루의 흔적을 치웠다. 캣타워, 스크래처, 로봇장난감, 화장실, 두부모래, 낚시장난감. 그리고, 블루의 건강을 위해 주문한 유산균, 그리고 블루가 좋아하는 터널장난감이 블루가 죽고나자 배달 되었다. 블루의 흔적들이 사라지자, 아니 흔적들을 버리면서, 다시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났다. 이렇게 블루를 지우는 내 자신이 잔인하다 느껴지면서 그러다 어쩔 수 없다고 위로한다.


사라지는 것. 존재, 생명, 그리고 흔적들.


실존은 존재를 전재로 한다. 존재하지 않는 실존은 없다. 존재하지 않으니 삶에 무관할 수도 있으나, 존재했을 때의 기억들, 그러니까 좋은 기억들은 부재의 슬픔을, 허망함을 가중한다.

작가의 이전글 은퇴 후의 상실감, 두려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