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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한 그릇

by 진주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라면이 먹고 싶은 날이 있다.

비가 내려 쌀쌀한 날 따끈한 국물 먼저 한 숟갈 입을 축이고 김이 모락모락 난 면발을 길게 늘어뜨리며 호로록 당기고 싶은 날 말이다. 학원에서도 비가 오는 날이면 컵라면에 물 붓고 상담실에서 몰래 살짝 국물이라도 마실라치면 어느새 문을 밀치고 저도 한 입 주세요 하며 들어서는 놈들이 있었다. 그래서 차마 먹고 싶어도 꾹 참고 늦은 밤 집에 와서 후루룩 후루룩 소리 내며 면발을 입안으로 빨아드리고 국물을 후후 불며 둘러 마셨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라면은 나보다 남편이 훨씬 잘 끓였다.

오늘 라면 먹고 싶은데 하나 끓여주면 안 될까? 가끔 쉬는 날 점심에 라면 먹자고 해도 손사래를 치는 내가 먼저 먹고 싶다고 하자 남편은 서슴없이 일어나서 레인지에 불을 댕겼다.

그리고 파마한 머리처럼 꼬불꼬불한 면발을 적당한 국물과 함께 송구하게도 대접에 퍼서 식탁에 차려 놓았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뜨거우면서도 목에 넘어가면 시원한 라면 국물과 탱글탱글한 면발을 남기지 않고 한 그릇 다 먹어 치웠다. 남편은 육십이 훨씬 넘었는데 혹시 회춘해서 입덧하는 게 아니냐고 놀려댔다.


1970년대 시골에서 중학교 다니던 시절 처음으로 라면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물론 대 도시에서는 이미 라면이 출시된 지 오래되었겠지만 ~~

장으로 간을 맞춰서 끓인 수제비와도 다른 맛이고 물론 소금으로만 간을 한 팥 칼국수나, 콩국수하고도 전혀 다른 맛이었다.


그동안 우리 식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맛으로 약간 느끼하면서도 짭짤하고 달짝지근한 맛이었다.

맨 가루로 찍어 먹어보면 늑늑한 맛이 이상했지만 일단 끓여서 넣기만 하면 전혀 색다른 맛으로 혀끝을 홀리기 시작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토요일 오후 섬진강 나룻배를 타고 싶은 친구가 나를 따라왔다.

한 시간 넘게 비 포장도로를 걸어서 배 타고 모래사장을 걸어서 우리 집에 도착했다.

갑자기 데리고 온 친구라 뭔가 대접을 해야 하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그때 스치고 지나간 게 라면이었다.

동네 자그마한 점방(슈퍼)이 하나 있었다. 공책, 연필, 도화지, 습자지, 성냥, 양초 등 약간의 과자와 막걸리를 팔았던 곳이었다. 과자도 흔하지 않아서 겨우 건빵, 센베 과자, 비스킷. 비과, 알사탕 정도였다.


가끔 건빵을 사서 먹었지만 유통기한이 훨씬 넘어서 눅눅하기 그지없었고 어쩔 땐 벌레가 나오기도 했었다. 그런데 주황색 비닐봉지에 빨간색 글씨로 쓰인 00 라면이 진열이 되자 초라한 점방이 갑자기 화려하게 변신했다.



라면이 나오기 전에는 주로 새참으로 국수를 많이 먹었다. 물이 부르르 끓기 시작하면 국수가닥을 넣고 끓여서 찬 물에 헹군 다음 체에 바쳐 놓았다. 장국에 말아먹기도 했지만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물에 사카린이나 양념장을 넣어서 막걸리와 함께 새참으로 먹었다.


그런데 라면 맛을 보자 폭발적으로 인기가 급상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라면 값이 감당이 안 되자 국수 가닥을 넣고 량을 늘여서 라면을 끓인 후 새참으로 내가곤 했었다.

학교 다녀와서 몰래 라면 한 봉지 끓여서 먹고 시치미 뚝 떼고 저녁밥을 시원찮게 먹으면 입이 까탈스럽다고 한마디 씩 하셨다.


마침 친구가 오자 큰 대접이라고 한 것처럼 국수 가닥을 넣지 않고 순수한 라면만 끓여서 김치랑 같이 상차림을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에는 제일 손쉽게 흔하게 먹는 게 라면이지만 옛날 70년대만 해도 대가족이 모여서 순수하게 라면 한 봉지씩 끓여서 먹는 것도 최고의 사치였던 것 같다. 주로 밀가루 반죽으로 수제비. 팥 칼국수, 콩국수를 별미로 자주 해 먹었다.


나이 탓인지 학창 시절에는 최고의 별식으로 먹었던 라면이 요즘은 별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한 그릇 비우고 나니 단발머리 시절 한 시간 넘게 걸어서 라면 한 그릇 먹고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간 친구가 생각난다. 그 친구도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 건빵 # 비스킷 # 국수 # 비가 #알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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