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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전쟁 중

by 진주

요양보호사로 처음 만났던 어르신은 성격이 강직하시고 하루 일과도 계획대로 생활하셨던 분이셨다. 서울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시고 얼마 있지 않아 6.25 전쟁이 일어났다.


영화관람 중 전쟁이 일어나서 지하에서 숨어 있다 몇 시간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공산당이 밀려와 서울을 장악했고 집집마다 호구조사를 다녔다. 어르신이 간호사라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인민위원회를 나오라고 하셨다. 서울시민은 배곯아 죽는데 공산당들은 남의 집 소와 돼지를 잡아놓고 질펀하게 먹고 놀았다.


인천상륙 작전으로 다시 전세가 남한으로 기울자 북으로 올라갔다. 이 어르신도 자기가 다녔던 대학교 교수까지 회유하며 북으로 갈 것을 종용하셨다고 한다. 빈 몸으로 갈 수 없으니 집에서 옷만 챙겨서 바로 오겠다 하자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대로 도망쳐서 집에 도착해서 쓸어졌다고 한다.


그 후 경주로 피난 가서 군부대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겨우 밥만 얻어먹었다. 식판과 숟가락도 부족해서 군인들이 밥 먹는 동안 기다렸다. 식판이 나오기가 무섭게 가져가 밥을 먹었다. 학벌도 출중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간호장교 시험 부산에서 치르게 되니 응시해 보라고 보내주셨다. 합격한 후 전선을 따라다니며 부상당한 군인들을 돌보았다. 진통제, 붕대도 제대로 없어서 급할 때는 손으로 쏟아지는 피도 받아냈다.


마지막 빨치산 토벌 할 때는 남원까지 내려와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을 치료해 주었다.

동상이 걸려서 살이 썩어가고 임신한 몸으로 신도 없이 내려온 아낙들도 있었다. 서울로 돌아왔는데 전쟁통에 서울 집을 지키시던 아버지께서는 굶어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고종황제 최 측근으로 지내셨던 분이셨데 지금도 친정아버지 이야기만 하시면 목이 메어 신다.


배고픈 시절 절절하게 겪어 오셨던 분이시라 모든 것을 아끼신다.

지금도 밥 한 톨도 버리시지 않는다.

밥과 국을 말아서 드시다가 한 숟가락이 남아도 냉장고에 넣어 둔다. 다음 끼니때 밥 한술 더 넣어서 데워서 드는 분이시다.

형편이 넉넉한데도 음식 아끼는 습관이 몸에 배셨다. 배울 점이 참 많은 분이셨다.




이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 겪으면서 살아오셨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 삼촌 세대들은 생과 사를 넘나들며 사셨다. 먼 과거의 역사가 아닌 지금도 살아계신 어르신들 기억 속에는 포탄이 떨어지고 내 앞에서 어린 군인들이 피를 쏟고 죽는 모습을 그대로 기억하고 계신다.



폐허가 된 서울에 다시 돌아와 행여나 전선에 나갔던 동생이 돌아오려나 기다렸다.

그러나 어느 골짜기에서 죽었는지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어르신의 기억 속에는 고등학생 교복 입은 동생으로 기억하고 계신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이 어르신은 날마다 6.25 전쟁을 치르고 계신다.

작년 코로나도 걸리고 그 뒤에 맹장염 시술도 했다. 휴직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만두게 되었는데 가끔 어르신 생각이 난다. 이번주에는 어르신이 즐겨드시는 플레닌 요구르트와 토마토 사서 꼭 찾아가 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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