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천지가 벚꽃으로 가득 찼다. 튀밥처럼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들릴 듯한 봄날이었다. 하지만 그해 봄, 큰오빠는 벚꽃이 밤새 환하게 터지던 그날 우리 곁을 떠났다. 삼일 내내 성모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고, 오빠를 항아리에 담아 먼 산 아래 두고 내려왔다. 간혹 늦게 핀 벚꽃이 나비처럼 날아다녔고, 연두 빛으로 물든 산천에는 진달래가 수를 놓았다.
길가에 봄꽃이 만발하여 그 향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 요양병원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또 세상을 떠나셨다. 큰오빠를 먼저 보낸 충격으로 어머니가 잠시 언니 집에 머물고 계셨는데, 마침 시골로 내려가시기로 한 날 아버지는 어머니를 기다리셨다는 듯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해 봄은 우리에게 참으로 잔인한 사월이었다.
섬진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에 아버지를 묻었다. 가끔 시골에 내려오면 아버지를 모시고 압록으로 매운탕을 먹으러 가던 길, 구례 산동으로 자식들 앞세워 온천욕을 하러 가던 길이 한눈에 보였다. 오고 가는 길목마다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곳이라 참 다행이었다.
아버지의 봉분을 둥그렇게 만드느라 동네분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떨어졌다. 그때 봉분 만드는 일을 진두지휘하던 이가 바로 진택이 오빠였다. 다들 청년 같았던 동네분들도 어느덧 흰머리가 희끗희끗했다. 삽으로 흙을 퍼 올리고 떼 짱을 입혀가던 그때, 눈물을 훔치던 어머니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하셨다.
"어이, 나 죽거든 내 봉분도 자네가 이쁘게 만들어 줘야 하네."
그러자 진택이 오빠는 목에 걸친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아짐! 걱정 마소잉. 내가 더 이쁘게 맹글어줄랑게."
그 말은 그저 웃어넘기는 농담이 아니었다. 오빠는 그 약속을 정말로 지켰다. 5년 전, 우리 어머니께서 101세의 일기로 천국에 가셨을 때, 오빠는 그날의 대답처럼 어머니의 봉분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드렸다. 오빠는 병마와 싸우는 중에도 어머니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마지막 길을 이쁘게 닦아주었다.
시골에 갈 때면 동네 어귀에서 늘 그 오빠를 만났다. "동생, 왔는가?" 하며 반갑게 맞이해 주던 사람. 오빠는 이름보다 '담배'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렸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짓궂은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이 모여 있던 순순이 언니 집에 놀러 갔다가 할머니께 들켰더랬다.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벌써 여학생을 꼬시러 왔냐"는 불호령에 다들 도망쳤지만, 진택이 오빠만 붙들려 곰방대로 머리를 맞았다. 그때부터 오빠의 별명은 담뱃대로 맞았다고 해서 '담배'가 되었다.
성실한 농군이었던 오빠는 군대 제대 후 같은 동네 아가씨와 결혼했다. 한 해 선배였던 그 언니는 우리 집안으로 시집와 올케언니가 되었다. 사나운 소의 고삐도 단번에 낚아챌 만큼 씩씩했던 언니와 오빠는 열심히 딸기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느 설날 밤, 눈이 엄청나게 쏟아진다는 이장님의 안내,방송에 밤새 비닐하우스 눈을 쓸어내며 빨갛게 익은 딸기를 지켜내던 오빠의 성실함이 눈에 선하다.
내가 결혼할 때는 오빠가 경운기에 내 혼숫감을 싣고 왔다. 사계절 이불과 방석, 베개, 그릇, 그리고 석작에 담긴 유과와 강정, 떡등... 혹시나 비에 젖을까 비닐을 꼼꼼히 덮은 경운기가 골목 어귀에서부터 탈탈거리는 소리 내며 들어왔다.
그 소리만 듣고도 시어머니께서는 "혼수품이 오는가 보다" 하시며 대문 밖까지 마중을 나가셨다.
집안 친척이기도 했던 오빠는 경운기에서 내리며 "아짐!" 하고 싹싹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불 짐을 하나씩 신혼방으로 옮길 때마다 오빠는 "동생, 이렇게 좋은 비단 이불에서 자면 잠이 아주 꿀맛이겄그만!" 하며 농을 던졌다. 빈 자개농만 덩그렇게 놓여있던 신혼방이 금세 혼수품으로 가득 찼다.
나락 수매를 하는 날이면 우리 막내오빠 이장을 하고 있던 관택이 오빠 진택이 오빠가 꼭 우리 집으로 함께 와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 시어머니께서도 오빠들을 위해 닭을 잡아 푹 고아 냄비채 대접하시던 기억이 난다.
가끔 아프다는 소식도 들렸지만 오빠는 늘 오뚝이처럼 회복해 다시 딸기밭으로 향했다. 페이스북에서 가끔 만나 "어이 동생, 잘 있는가?" 안부를 묻던 것이 마지막 소통이었다. 지난 8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끝자락에 오빠가 내 게시물에 '좋아요'를 남겼다. 그것이 오빠의 마지막 인사인 줄도 모르고 나는 무심하게 답조차 하지 못했다.
쇠도 녹일 것 같은 젊음으로 땅을 일구던 진정한 농사꾼은 그렇게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야 소식을 듣고 마지막 가는 길에 인사조차 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이 쓰인다. 고달리 땅을 한평생 굳건하게 지켰던 오빠. 이름보다 '담배 오빠'라고 부르는 게 더 친숙했던, 누구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당연하다는 듯 허허 웃으며 대답하던 오빠.
항상 부지런했던 오빠는 하늘나라에서도 경운기 끌고 다니며 새 또랑 밭 새 정제를 누비고 다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제 하늘나라에서는 무거운 짐 내려놓고 편히 쉬고 계시겠지. 평생 땀 흘려 자식들 잘 키워내고 진정한 농부로 사셨던 오빠, 고생 많으셨소.
이제는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셔요.
11월 끝자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