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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빚은 김장 풍경

by 진주

우리 동네에는 새 또랑 밭, 평문이 밭, 조굴탱이 밭, 바저울 밭이 있었다. 그중 주로 새 또랑 밭에서 무와 배추가 잘 자랐다. 이맘때면 배추나 무를 뽑아 리어카나 지게로 나르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소금에 절인 배추를 또랑가에서 씻을 때는 흐르는 냇물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씻은 배추는 아저씨가 지게 발대로 지어 집으로 날랐고, 집에서는 수돗가에서 한 번 더 씻어 대나무 평상에 나란히 엎어 물을 뺐다.


물이 빠진 배추는 갖은양념으로 마사지하듯 정성껏 버무렸고, 깍둑깍둑 썬 무도 다라이에 남은 양념을 쭉 훑어 담았다. 홍시 빛깔처럼 고운 깍두기는 그냥 먹어도 달고 맵고 맛있었다. 남은 배추 잎과 무 잎은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가 시래깃국을 끓여 먹었다. 깨끗한 무청 시래기는 짚으로 엮어 담벼락에 걸어 두었다. 햇빛과 바람, 눈으로 얼었다 녹았다 반복해서 마른 시래기도 겨울철 귀한 국거리였다.


며칠 전, 절인 배추 네 박스를 주문해서 김장을 했다. 이십 년 넘게 단골인 괴산 배추는 줄기가 짧고 꼬실꼬실하니 달 찍지 근 하고 맛있다.

겉잎이 두꺼운 배추는 물이 많아 싱겁다.

며느리가 하루 전날부터 와서 도와주었고, 김장 버무리는 일은 남편이, 진두지휘는 언니가, 저는 수육과 찌개를 끓였다.


김장하는 가구는 줄어도 우리는 아직 꼭 김장을 한다. 언니네는 점차 나이가 드니 내년에 또 담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올해 일곱 박스를 담가 정을 담아 여기저기 나누어 주었다.

종갓집 큰 딸로 살다 시집온 언니라 역시 다르다. 지원군으로 든든한 두 딸이 합세하자 산더미 같은 배추포기가 금방 줄어들었다. 형부가 익은 김치를 좋아하니, 내년 여름, 유산균 폭탄의 톡 쏘는 맛이 혀끝을 놀라게 할 것이다.


강원도 원주에 사는 우리 아들 네 처갓집은 지금도 직접 배추를 파종한다. 올해도 삼백오십 포기 정도 심었다고 한다. 아흔두 살 할머니께서 백오십 포기, 장인·장모님은 인제 주말 농장에 이백 포기.

딸 넷, 사위 넷, 손주 사위 둘까지 합세하는 김장 멤버가 정해져 있다. 배추를 뽑고 나르는 일은 사위가, 절이는 일은 딸들이, 씻는 일은 손주 사위가 한다. 김치 속 넣는 일은 온 식구가 함께 모여 웃음과 정성까지 곁들여 마쳤다고 한다.

우리 집도 해마다 큰 김치통으로 한 통씩 얻어먹는데, 강원도 김치는 익을수록 시원하고 깊은 맛이 있다.


이십구 개월 된 우리 손녀딸도 한몫을 톡톡히 한 모양이다. 사촌 오빠와 흙장난을 하다가 절여진 배추를 만져 혼이 나기도 했다고 한다. 누가 잠시 벗어둔 고무장갑을 얼른 집어 고사리 같은 작은 손에 끼워보려 낑낑거리기도 했다네요. 시골집이라 옆 닭장에 가서 노는 모습도 귀엽기만 하네요. 그러다 김장하는 곳으로 달려와 자꾸만 '일거리'를 만들기도 했대요. 하지만 이 작은 발자국 소리도 김장에 특별한 맛을 더했을 것이다.


그래도 가장 놀라운 일은 아흔두 살 할머니께서 배추 심기부터 키우고, 뽑고, 절이고, 씻고, 양념까지 총 진두지휘를 여전히 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내년에는 힘들어서 배추를 심지 않겠다고 하지만, 내년이 되어봐야 알 수 있지요. 건강하신 사돈 어르신, 이번 김장하는 날의 최고 영웅은 바로 어르신이십니다.


요즘 시대에 여자 잘 만나 김장 김치를 먹는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사돈 댁의 김장하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는 입이 다물어졌다. 김장하는 가구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정을 담아 김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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