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애똥 밭 가는 길

태양초 고추는 바로 이것이제!

by 진주


내년에 윤달이라 올 추석은 빨리 돌아왔다. 아직 오곡백과가 무르익기에는 이른 철이다.

그런데도 시장, 마트에는 밤, 대추, 사과, 햅쌀 등이 진열되어 있다.

긴 가뭄도 이기고 몰아치는 장대비와 폭풍도 이겨낸 농산물이 새삼 귀하다.

열매 맺기까지 가슴 졸이며 일구어낸 우리 삼촌, 오빠, 언니들이 장하고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께도 감사하다.

밑에 층에 사는 언니게 전화가 왔다.

친척에게 부탁한 태양초 고춧가루 벌써 착했단다.

김장철이 또 금방 오겠지.




우리 집 고추밭은 애똥 밭이다.

집 앞에는 제법 큰 시냇물이 흘렀다. 징검다리를 겅중겅중 건너서 가면 삭동 할머니 집과 장동 할머니 집 사이에 골목길이 바로 보인다.

울퉁 불퉁한 길을 지나면 탱자나무 울타리 가 병풍처럼 둘러 있다.

우리 집 감나무 밭이다.

장두 감, 넙적 감, 뾰쪽 감, 물감, 먹감이 주렁주렁 열려서 자기 모양대로 커가고 있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벗어나면 작은 오솔길 구불구불 펼쳐져있다.




산을 개간해서 만든 밭에 참깨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려있고,

고추도 붉직 붉직 익어가고 다.

밭 언저리에는 강냉이도 쭉 뻗어서 마디마디에 빨갛게 물들인 수염이 윤기 나게 늘어져 있.

올 강냉이는 벌써 여물어 수염 갈색으로 빠짝 마른 채 주인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목화밭에 연분홍 꽃이 피더니 어느새 여물기 시작했다 목화솜 되기 전 이것을 다래라고 한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우리들에게는

간식거리가 되었다.

풋풋한 맛, 달달한 맛이 좋아서 자주 따서 먹다가 할머니께 혼이 나기도 했다.

다래가 익으면 흰 눈처럼 얗게 피었다.

그게 목화솜이다. 하나, 둘 따서 해년마다 모아 두었다가 딸이 시집가면 두툼한 솜이불을 만들어 주었다.




드디어 애똥밭에 다다랐다.

섬진강이 내려다 보이고 멀리 철길도 보인다.

아침밥을 먹자마자 고추를 따기 시작한 엄마 소쿠리에는 빨간빛이 하나 가득 넘쳐났다.

고추밭 사이에 탐스럽게 열린 보라색 가지를 따서 한입 베어 물었다

"아침밥 금방 묵고. 먼 생까지를 벌써 따 먹냐" 쌩 까지는 찬바람이 나면 맛나도 지금 묵으면 입이 픈디

약간 입술이 쪼이는 듯한 느낌이 있지만 스펀지처럼 부드러워 먹을만했다.




며칠에 한 번씩 수확한 고추는 처음부터 햇빛에 말리지 않고 안방에서 나흘씩 궁굴렸다. 매운 냄새로 방안에 들어서면 기침이 절로 나왔. 고추 속에 든 벌레가 가끔 기어 나와 꼬물꼬물 기어 다니기도 했다.

사 나흘 지나서 냇가 옆에 멍석을 펼쳐 놓았다.

방 안에서 궁굴렸던 고추를 햇살이 퍼질 때 내다 널었다. 해가 지면 다시 걷기를 며칠 동안 하는 동안 소쿠리가 점점 가벼워진다

고추 말릴 때는 햇살이 좋아야 한다.



해 질 녘이 되면 할머니께서는 " 그 어메 힘가 고추 좀 걷어 오니라"

앞 집 경호랑 연동 떡 아들 해경이는 진작 고추도 걷고 덕석도 채서 덮어났드라,

따사롭게 내려쬐인 햇볕에 마른 고추는 손바닥 닿을 때마다 바삭바삭거고 소쿠리가 훨씬 가벼워졌다.

고추가 다 마른 것이다.

바싹 마른 고추는 꼭지 따고 깨끗한 헝겊으로 닦은 후에 방앗간에 가져갔다.

대충 씨를 뺀 고추를 빻은 동안 넘어갈듯한 기침을 몇 번하고 나면 빨갛게 분말이 되어서 미끄럼 틀에서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고추장 담을 건 좀 더 곱게 빻았다.

이것이 바로 태양초 고춧가루다.




요즘에도 아파트 출입문 한쪽에 돗자리를 깔고 고추를 말리신 분들이 있다.

한 번씩 이리저리 뒤적이는 굵은 손마디를 보면 애똥밭 고추밭이 저절로 떠오른다.

햇볕을 등지고 말라가는 고추를 뒤적거린 할머니 등에 햇볕이 따사롭다.


마을 어귀만 들어서면 온통 빨간 고추로 카펫을 깔아 놓은 것 같은 우리 동네 옛날 풍경이 앞에 펼쳐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추석이 오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