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박 2일 가을소풍

천마산을 넘어서 구례 화엄사까지

by 진주


가을 소풍 가는 날
새로 사 온 운동화를 머리맡에 올려놓고 비가 올까 염려되어 들락날락 거리며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별이 총총 빛나 있었고, 하얀 물결이 흐르는 듯 은하수도 보였다.
새벽부터 도시락 준비와 식구들 아침 준비에 양쪽 아궁이에서는 솔갱이가 타고 있었다.

닭장에서 꺼내온 계란과 감 밭에서 채취해온 솔(부추), 당근, 치자 물들인 샛노란 단무지,
시장에서 오랜만에 사 온 어묵도 부쳐서 김밥을 싸주셨다. 삶은 계란도 몇 개 더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이번 가을 소풍은 천마산을 넘어서 구례 화엄사까지 걸어가는 그때 당시 국민학교 5, 6학년 학생으로서는 무리가 되는 강행군이었다.

천마산 기슭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오솔길이 나 있었다. 겨울에 땔감을 마련하느라 집집마다 다니다 보니 저절로 생긴 길이었다. 중간쯤 올라왔을까 작년에 올린 초가지붕이 회색으로 변해가는 집 한 채가 보였다.

그 집에 살고 있는 우리 친구가 소풍 대열에 함께하기 위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이 친구는 날마다 등교하는 시간이 봉우리에 숨어있던 해가 아직 떠오르지 않은 새벽이었다. 한참 앞장서서 가는 6학년 선배들이 벌집을 건들었나 보다. 벌떼들이 왱왱거리며 날아다니고 벌에 쏘인 학생들은 비명을 질러대고 선생님들도 윗옷을 벗어서 쫓다가 얼굴을 벌에 쏘여서 퉁퉁 부어올랐다.

한 바탕 벌 소동이 지나가고 점심때가 되어 드디어 맛있는 도시락 먹는 시간이 되었다.
가파른 산을 올라오느라 꽃이 핀 것처럼 예쁜 김밥은 뒤죽박죽 되어 숟가락으로 퍼 먹어야
될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 주위를 살펴보니 벌에 쏘여 아직도 눈물을 훔치고 있는 학생 수건으로 얼굴을 싸매고 먹는 학생들도 보였다. 벌에 쏘인 선생님들도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평상시 모습이 아니었다. 그때는 상비약도 없어서 물이나 침을 발랐던 것 같다.

가방이 가벼워져서 걷기가 한결 쉬워졌지만 그래도 갈수록 걸음걸이가 무거워 반별로 줄 서서 걸었지만 자기 줄을 지키지 못하고 중간에 섰던 친구들이 뒤로 처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다리 힘이 풀릴수록 선생님들 호루라기 소리가 커졌다.

(천마산으로 올라가는 입구 목동 방죽)


하루 종일 걷다 보니 어느덧 해는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가고 화엄사 앞 기와집으로 된 여관 앞에 도착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우리들이 하루 밤 묵을 곳이란다. 점심 먹고 줄 곳 걸어서 우리들은 너무 배가 고팠다. 저녁 밥상에 무슨 반찬이 올라왔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콩나물 무침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힘든 하루였지만 저녁을 먹고 난 후라 다들 힘이 났는지. 삼박자 놀이가 시작되었다, 걸린 친구들은 국민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때 당시 유행했던" 섬마을 선생님" "동백아가씨" 등을 멋들어지게 불러댔다.

한쪽에서는 벌써 잠을 자는 친구들도 있었다.


집 떠나와서 낯선 곳에서 잠을 잔다는 게 두려웠지만 고단했던 우리들은 화엄사 계곡에서 밤새 흐르는 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른 아침 선생님들께서는 늦잠 자는 우리들을 깨우려 다니셨다.

화엄사는 백제 성왕 때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께서 화엄사를 창건하고 법왕 때 삼천 명의 스님들이 계시면서 백제 땅에 화엄사상을 꽃피웠던 유서 깊은 고찰이다.

화엄사 문 앞에 들어서자마자 양쪽 문 위에서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는 사천왕에 놀라서 자빠질 뻔했다. 처음으로 와본 화엄사는 다녀도 끝이 없었고 어디를 구경했는지 기억도 없다. 4 사자 3층 석탑 앞에서 선생님과 함께 기념사진 찍은 것만 기억이 나는데 안타깝게도 그 사진마저도 없다.


점심 먹고 천은사를 가기 위해 줄을 맞춰서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들판 길을 또 걷고 또 걸었다. 물병에 담은 물도 무거워서 중간쯤 가다가 길바닥에 쏟아버렸다.
화엄사에서 천은사까지 도보로 지금 찾아보니 2시간이 걸렸다.
세상에나 그 길을 국민학 5, 6학년들이 걸어서 갔다는 것은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은사에서 다시 구례 기차역까지 걸어서 기차를 타고 곡성역에 도착해서 또 집까지 걸어서 왔다.
화엄사, 천은사 절 이름만 기억할 뿐이지 무엇을 보고 왔는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때 되면 밥 먹고 다시 줄 서서 걷고 걸음걸이가 풀어지면 선생님 호루라기 소리만 기억난다.

그러나 친구들을 만나면 그때 가을 소풍이 가장 기억에 남은 추억으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리는 그때 이미 국토종단을 경험했던 이다.


부모님들도 5.6학년 자녀들이 꼬박 이틀 동안이나 산을 넘고 걸어서 화엄사. 천은사를 다녀와도 학교에서 하는 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생님들을 믿고 따랐다.

전쟁 후에 태어난 우리 세대들은 20리나 되는 거리의 학교도 다 걸어서 다녔다.
소풍도 극기 훈련처럼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이틀 동안 걸어서 다녀왔던 우리들이기에 산업현장에서도 깡으로 버티고 열사의 나라에 가서도 외화벌이를 해오지 않았을까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우리 세대들의 굵은 땀방울은 곳곳에 배어있다.
자랑스러운 우리 친구들!

지금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때 벌에 쏘이면서까지 우리를 이끌어주셨던 선생님과 천마산 중턱에 살았던 얼굴이 희고 곱상했던 우리 친구가 그립다. 다들 어디서 살고 있을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지금 신발이 몇 켤레나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