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Arte)

by 고우니

취침용으로 대충 틀어놓은 인문학 강의에서 ‘아르테(Arte 탁월함)’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 비몽사몽 중 귀에 꽂힌다. 각자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최고를 향해 나가라는 의미란다. 그러나 외면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나의 과거와 비교해서 더 나은 나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모든 일정들이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와중이다. 노래 수업도 한 달이 더 지나서야 겨우 시작했다. 며칠 전 레슨이 끝나고 나오다 주임 교수를 만났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번 학기엔 연주는 어렵겠지요?”

“아, 미처 말씀 못 드렸네요. 이번엔 학기는 일정 채우기도 버겁고 사람들 모이는 일도 망설여져서 그냥 지나려고 했는데 다들 하자네요. 연주를 해야 한 학기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고, 자기의 성장을 되돌아볼 수 있다고. 그래서 손님 초대는 가급적 줄이기로 하고 연주는 하기로 했어요,”

“힘들긴 하지만 연주를 하면 많이 늘긴 하죠. 그런데 연주일은 언제예요?”

“3주 후에요. 건물 리모델링 때문에 시간을 늦출 수가 없었어요.”


어쩐담, 시간이 너무 짧다. 포기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 주임 교수가 한마디를 더한다.

“부담스러우면 안 하셔도 되지만, 웬만하면 하시게요. 악보 보고 하셔도 되니까.”

악보 보고 한다면 못할 것도 없겠다 싶긴 한데….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옆에 서 계시던 성악 선생께 여쭈었다.

“그런데, 곡은 뭐로 하죠?”

“Da Tempeste~하고 Piangero~ 하면 될 것 같은데요?”

헨델(George Frideric Ha"ndel,1685~1759)이 작곡한 오페라 ‘율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중 클레오파트라의 아리아다.

“어렵지 않을까요? 게다가 너무 길고…”

“그렇긴 한데, 충분히 하실 수 있어요.”

“그런가요? 그럼 해볼게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악보를 펼쳤다. 이게 대체 몇 장이람. 곡 하나가 일곱 장? 피아노 반주도 화려해서 반주자와 호흡 맞추는 것도 쉽지 않겠다. 일단 오페라 전체의 줄거리와 역사적 배경부터 찾아봐야겠다. 노래의 감성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곡 전체의 배경과 분위기를 아는 게 좋을 테니까. Da Tempeste il ligno(폭풍으로 배가 깨지면)는 죽은 줄 알았던 시저가 살아있다는 것을 안 클레오파트라가 기쁨에 차서 부르는 노래이고 Piangero la sorte mia(내 운명을 슬퍼하지 않으리)는 프토로미에 잡혀 투옥된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고통을 신께 호소하는 노래다. 노래의 내용도 난이도도 가볍지 않다. 이걸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기야 어떤 연주인들 쉬운 적이 있었나. 일단 가사를 외워야겠다. 밀어 두었던 악보를 당겨왔다. 하다 못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야지.


정해진 날짜는 빨리도 찾아온다. 어느새 연주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머리 손질하랴, 아직까지도 헷갈리고 있는 가사와 가락 익히랴 정신없다. 공연장까지 거리가 멀어서 서둘러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리허설 시간보다 조금 일찍 반주자와 만나서 맞추기 어려운 부분을 체크했다.


나는 내 걱정을 농담에 섞어 반주자에게 말했다.

“혹시 내가 제때 치고 들어가지 못하면 그땐 멈추지 말고 그냥 가세요. 반주가 워낙 멋있어서 사람들이 피아노 솔로 부분이겠거니 할 거예요.”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종종거리느라 피곤했던지 고음처리가 버겁다. 본 연주에서는 힘을 내야 할 텐데….


시간이 되어 무대에 섰다. 피아노 전주가 흐르고 나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부드럽게 나가야 할 첫 음이 목을 긁으며 거친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뭐지? 나는 순간 당황해서 머리가 하얘졌다. 피아노 반주는 계속 이어지고…, 내 머리는 수세미가 되어 엉키고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데 내 입은 기를 쓰고 소리를 내고 있다. 몇 소절이 그렇게 지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 후로도 한두 번의 위기를 넘기며 겨우 노래를 마쳤다. 중간에 멈추지는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어쩌랴, 어쨌거나 애썼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를 위로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엄마, 잘했어. 짱, 짱.”

일찌감치 공연장에 와서 나를 봐준 딸이 엄지까지 치켜세우며 칭찬을 한다.

“이궁, 엄마 인생 최악 연주인 거 다 알면서.”

“사실 노래 시작하자마자 엄마 동공이 마구 흔들리는데, 내 간이 다 녹는 줄 알았어. 근데 그건 나만 알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을 거야. 다행히 금방 안정되면서 잘 찾아가더라고. 위기 대처 능력 대단해. 영상 찍은 거 엄마 폰으로 보냈으니까 봐봐. 괜찮았어. 정말이야. 우리 엄마 애썼으니까 이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망친 게 분명한데도 딸의 말이 위로가 된다. 어느새 연주는 잊어버리고 딸과 수다를 떨며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딸이 녹음해 준 연주 동영상을 볼 용기가 선뜻 나질 않는다. 내가 나를 위로하고 괜찮다고 하는 거야 내 마음이지만 증거로 남은 실수를 다시 봐야 하는 민망함은 어쩌나. 집에 돌아온 뒤에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망설였다.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고…, 마음을 다잡고 영상을 틀었다. 어라? 완전 망했다고 생각했던 도입부도 그런대로 봐줄 만하고 가사와 가락도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애써 잘 익혀 놓았던 것이 제값을 했구나. 정신줄 놓은 내 머리와 달리 입이 혼자서 고생했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영상을 다시 돌렸다. 어쨌거나 지난 학기에 비해 한 걸음 성장했다. 결과만 본다면 아쉬움이야 많지만, 어차피 완벽하지 못했을 텐데 조금 더 잘했다고 아쉬움이 없을까. 내가 대단한 음악가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곡을 완성해 가면서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채워가는 과정이 좋아서 계속하고 있을 뿐인걸. 노래를 통해 막연히 알던 역사 이야기에서 사람의 숨결을 느끼고 그들의 삶 한 가닥이나마 이해해 보려는 시간을 가져 본 것도 또 하나의 나를 발전시킨 셈이지 싶고.


언제까지 노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생각보다 빨리 그만둬야 할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날까지 나의 최선을 다해 나만의 최고를 만들어 가는 것. 나의 아르테(Arte)!

아침 산책길의 풍경. 행복은 발견하는 자의 몫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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