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다육이 새끼가 나보다 낫네_2

오늘도 살아 있는 중.

by 은송하

“환자분의 마음과 같게 크지 않도록 아이들을 사랑하세요.”


의사는 혹여 내가 아이들을 방임할까,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염려되었는지 아이들을 들먹였다. 의사로서 적당한 선을 지키면서 당부하는 것이 꽤 자연스러웠다. 이런 어미가 지나갔던 자리들이 마음에 걸렸었나 보다. ‘네가 선택한 결혼이니 네가 책임져야지.’라고 하던 친정엄마의 말보다는 다정해 보였다.


이 생애에 나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랑과 책임이 나의 죽음에 대한 간절함을 이길 수 있을까. 나에게 생존을 위해 투쟁할 내면의 힘이 존재할까.


1942년 나치에 의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들어가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는 의사로서 근무한 빅터 프랭클은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아무리 척박한 환경에 있더라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관한 것은 오롯이 자신의 내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고 했다.


나의 선택은 철저히 감추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죽음을 헤아리고 죽음에 대한 소망을 담은 기도들, 죽음을 바라는 마음 한 조각이라도 아이들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했다. 가족이 있다는 건 행복한 것이고 미래를 그리는 건 재미있는 일이라고 아이에게 말했다.


가족은 잘 돌아보되 나 자신은 잘 돌보지 않고 있다. 안티에이징을 위한 상품들이 넘쳐나고 자기 관리가 우상이 된 시대에 나는 게으르게 살고 있다. 이 게으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강력해서 내가 원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건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건지 헷갈린다.

미용실에 가지 않고 스스로 머리를 깎은 지가 몇 해 되었다. 수면은 일과 육아, 집안일을 하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 정도. 음식으로 즉각적인 위안을 얻으려는 패턴의 수긍. 운동은 통증이 생기지 않을 정도. 그러나 이러한 게으름이 가까운 이들을 불안하게 했을까?


찰랑이는 불신때문에 낙심을 머금고 자주 죽음을 꿈꾸며 살고 있다. 그렇기에 아이들만큼은 믿음이 있어 담대하고 즐겁게 살기를 기도했다. 가정 예배를 드렸다. 간절함의 다른 주머니에는 아이들의 행복이 있었다. 아이는 어느 날 뜬금없이 이런 기도를 했다.


“우리 엄마, 오래오래 살게 해주세요.”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 다육이가 있다. 화분이 작아 보여 집 분리수거 봉투에 있던 플라스틱 통에 흙을 넣고 분갈이했다. 식집사에 소질이 없어 그런지 뿌리가 있는 부분이 온전히 땅에 파묻히지 못하고 삐죽 튀어나와 버렸다. 다시 본래 화분으로 옮겨 담을 엄두가 나지 않아 방치한 지 좀 되었다.


오랜만에 들여다본 못난이 다육이 옆, 통 모퉁이에 삐죽 작은 다육이들이 자라있다. 꽃이 핀 것도 본 적 없는데 언제 씨가 떨어진 거지? 게다가 햇빛을 쫓아 길게 자라던 다른 다육이에게 떨어진 잎에서 새끼 다육이가 자랐다. 둘이었던 다육이가 다섯이 되었다.



척박한 땅에 떨어진 것에 기죽지 않고, 본체에서 떨어진 것에 소스라치게 놀라하며 말라비틀어지지 않았다. 양분을 머금고 있던 세포들은 죽지 않았다. 뿌리가 되고 도톰하고 짧은 다육을 만들어 냈다. 흙의 일부가 되지 않고 새로운 개체, 이어지는 생명이 됐다.


아들의 사랑과 기도 때문일까? 다육이 새끼의 사진이나 찍으면서 감동이나 하고 있으니. 귀여워하고 있으니.


내 사랑과 책임감이 있으면 잠잠할 줄 알았던 죽음에 대한 간절함은 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밖에서 온 다정함과 훈계, 사랑과 기도 때문에 조금씩 가라앉았다. 밖에서 온 것들이 내면을 채우고 채워진 내면이 선택할 수 있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보겠다는 선택.

오늘도 아직은 살아 있는 중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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