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6·25 전쟁 때 탈영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탈영병이 되었는지 아시려면 약간의 시대적 배경이 필요합니다. 우선 그때는 지금처럼 휴대폰이 없었습니다. 물론 전화를 통해 연락하기도 쉬운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우체국 편지를 통한다고요? 군에서요? 언감생심입니다. 전령들이 모두 들고뛰었죠. 그저 인편을 통해 드문 드문 소식을 전한다 해도, 전쟁통이라 1년 안에 생사를 전하면 그나마 다행이죠.
편지보다 반가운 건 전쟁통에 나간 아들이 돌아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쟁 중에도 어떤 아들들은 가끔씩 돌아왔습니다. 그때도 '휴가'는 있었거든요. 어느 날 제가 불려 간 이유도 이 '휴가' 때문입니다. 휴가 가서 좋겠다고요? 아닙니다. 저는 휴가 가는 병사들 한 무리를 인도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정표 같은 역할이라고나 할까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때는 한글이나 숫자를 제대로 못 읽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런 병사들을 위해 버스, 기차표 구매하는 것부터 집에 가는 길까지 길잡이 역할을 하라더군요. 제가 우리 부대에서 좀 똑똑한 축에 속했던 것일까요? 아무튼 명령받은 대로 저는 살아있는 내비게이션이 되었습니다. 고생 고생하며 다들 집으로 보내고, 제 생각에는 그래도 최대한 빨리 부대로 복귀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제가 탈영병이랍니다.
내게 명령을 내렸던 이가 누군지는 확인조차 되지 않더군요.
그렇게 저는 구금이 되었습니다. 다시 풀려났지만 탈영을 했었다는 기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십 년이 흘러 저는 자식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저를 6·25 참전자로 등록하기 위해 뛰어다니다 제 병적기록을 발급해 왔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