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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이병헌입니다

<無我>

by 둔꿈

뒤풀이 장소에 도착해서야 나는 저녁 내내 함께 했던 단원들의 이름을 하나 둘 들을 수 있었다.

돈키호테, 둘시네아, 산초, 여관주인 1 등으로 알고 있던 이들의 이름이 친숙한 한글 이름 세 글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과하게 친숙한 이름을 만났다.

"제 이름이요? 병든 이병헌입니다."

씩 웃으며 낮은 저음의 듣기 좋은 음성으로 말하는 이는 돈키호테다. 아까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르며 주인공 역할을 하던 사람.

내가 눈을 깜박거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자 옆에 있는 여자분이 재미있었는지 까르르 웃으며 끼어든다.

"눈 감고 들으면 진짜 이병헌 목소리라니까요. 성대모사 한 번 해봐 줘요!"

그는 익숙한 상황인 듯 바로 이병헌의 드라마 대사를 성대모사하기 시작한다.

와! 배우 이병헌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이 분 목소리가 더 좋다.

저녁 한 때 행복했던 시간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사실 나는 언젠가부터인가 목소리에 약한 사람이 되었다.

아마 지금 나의 업이 콜셀터 직원인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루에 서너 번은 꼭 맞닥뜨리게 되는 짜증 난 민원인들의 음성을 올해로 7년째 누적해서 들었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의 외모, 얼굴만 따지는 속물을 가리켜 '얼빠'라고 하는데 그런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있다면 나는 100% '목소리빠'다.

그런데 오늘 극단에 들어온 1일 차, 나는 난생처음 경험하는 목소리 천국에 행복의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이번주 내내 쌓여왔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확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아~~ 귀가 정화되고 있다!

분명 첫인상은 수도승들처럼 조용하던 분들이었는데, 대본 리딩을 진행하자 완전히 다른 사람들로 변신을 했다. 중간중간 노랫소리까지 가미되기 시작하니 이런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아까 몇 달 뒤에 있을 공연의 음향과 조명 역할에 대해 누가 해야 하는지 잠깐 토론을 했었는데, 마음 같아서는 손을 번쩍 들고 외치고 싶었다.

"저 연기 안 해도 괜찮아요. 평생 음향과 조명만 하며 여러분을 응원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도 사회생활 짬밥이 한 두 해가 아닌 사람이다. 신입답게 조용히, 시키는 것만 하는 것이 맞다!

그랬더니 나에게도 연기를 시켰다. 대사 단 두 마디인 돈키호테의 조카!

그런데 나는 '목소리빠'답게 돈키호테의 노랫소리를 넋 놓고 듣다가 대사를 해야 하는 템포를 놓쳤다.

옆에 있는 분이 손으로 툭 치며 알려주셔서 겨우 대사를 해낼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처럼 어울리는 목소리의 향연에 쭉 행복했던 나의 첫 극단활동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모두에게 감사하지만 뒤풀이에 참석한 병든 이병헌에게 조금 더 마음을 담아 막걸리 한 잔을 권했다.

다음 주에 또 봐요! 병든 이병헌!

<無我>


음악처럼 흐르는

네 목소리에 시간을 잊었다


시간은 나를 잊었다.


무아의 세계 속에서

또 다른 나를 찾는다.


나는

웃는 듯 우는 듯 울리는


오케스트라 향연 속으로

푸른빛 내일 안으로


타박타박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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