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빙신을 만들라고?

<나>

by 둔꿈

너무 어렵다. 감독님께서 이제는 'Being'이니 'Doing'이니 영어를 섞어가며 연기 지도를 시작하셨다. 우리에게 배우 '신구' 선생님 이야기까지 예를 들어가며 열정적으로 말씀하신다.

'감독님도 배우이신데 우리를 지도하시는 건 겸업이신가? 혹시 신구 선생님을 직접 뵈었을까?'

마음속 사담을 억지로 구석으로 몰아놓고 귀를 쫑긋 세운다.


"여러분이 그 배역을 Doing 한다고 생각하면 Doing Scene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Being이 되면 그 배역 자체로 무대 안에서 존재하게 되는 거예요. 관객들은 모두 알아요.

여러분이 그 배역이라고 그저 생각하고 연기를 하는 것인지, 그 배역 자체가 되는 것인지 말이죠.

스스로의 목소리가 작다고, 혹은 제스처가 어떻다는 생각 즉 Doing에 집중하지 마세요.

Being이 되어야 합니다!

신구 선생님은 무대에 오르기 전 두 시간 동안 아무도 안 만나셨어요. 오로지 그 배역 자체가 되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일까? 오늘 저녁 연습하는 단원들의 모습이 더 열정적으로 보였다. 오늘 하루종일 직장 업무에 탈진한 것처럼 표정이 힘들어 보이던 여주인공 둘시네아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힘차게 노래 부르고 있다. 평소에는 우아한 귀부인처럼 보이는 분이 촐싹대며 산초연기를 하는데 또 얼마나 감칠나게 재미있던지 모두들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나는 '해설자' 주제에 괜히 대본 내용을 즉석에서 고쳤다가 다른 배우들을 헷갈리게 만들어버렸다. 단원들이 빙신 만드는 것에 오히려 장애물이 되어버리다니!

나의 작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했다. 그런데 그렇게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부터 묘하게 울렁대던 마음이 더 출렁대는 것 같았다.

아마도 아까 감독님에게 들었던 생각 하나가 마음에 만든 파동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Being, 내 삶에서는?

나는 나로 있는 것이 맞을까?

그저 Doing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뭔가를 해야 한다는 급급한 삶의 파도가 나를 툭툭 쳐대서 어쩔 수 없는 조잡한 행동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정말 존재하는 '나'라는 사람은 어디쯤 표류하고 있는 것일까?

극단 활동이 끝나고 생각에 잠겨 어두운 밤거리를 타박타박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치 내가 나를 줍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일부러 한참을 걸었다.

뭔가가 마음속에서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


세상 풍파 속 매일 잘게 부서져

흩뿌려진 가련한 마음 조각들


이 붉은 밤

밤새 허리를 숙인 채 길을 걷는다.


그저

나로 있기 위해

파편들 하나하나 주워 담아


나는 내가 된다

keyword
이전 03화아이고, '산초'를 하라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