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극단의 가장 큰 애로사항을 묻는다면 당장 말할 수 있다. '피곤함'과의 싸움이다.
유독 회사에서 피곤한 일이 많았던 하루였다.
노곤함에 절어 있는 나의 마음은 당장 집으로 가라고 꼬드기고 있었지만, 조선시대 내시를 연기하겠다며 2주를 연습했지 않은가?
겨우 "주상전하 납시오" 등 몇 마디 대사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무거운 다리를 겨우 끌고 ○○소방서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밀도 있는 연습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7분 50초 정도 되는 단막극 분량, 하지만 실질적인 우리의 연기는 놀랍게도 채 3분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모두들 더 열정적으로 연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기한 사람들. 분명 불과 십여 분전까지만 해도 나처럼 축 늘어져 있었는데......
심폐소생술 경연대회의 단막극답게 가장 큰 주인공은 역시 '심폐소생술' 차지였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내 역할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아니, 왜 내시가 이렇게 힘들어.
헉~헉! 누구 나와 역할 바꿀 사람?"
모두들 웃기만 할 뿐 바꾸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왜 내시 주제에, 황송하옵게도 왕과 호흡을 맞춰 중전의 가슴에 손을 대고 심폐소생술 해야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구시렁대는 이유를 심폐소생술 연습해 본 사람들이나 조금 알까? 아니면 낮에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서 방전된 것일까?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정말 오랜만에 입에서 단내가 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20여 년 만에 다시 해본 심폐소생술은 그냥 심장 부위를 콱콱 누르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압박에 이완까지 신경 쓰며 손을 떼서도 안 되는 이 민감함의 영역이라니......
더군다나 우리 매니저인 소방관님은 또 얼마나 열심히 가르쳐주시는지, 나중에는 심폐소생술 상태를 체크할 수 있는 연습앱까지 켜주셨다. 하다 보니 나도 오기가 생겼는지, 아무리 해도 완벽하게 했다는 것을 뜻하는 푸른색 불이 들어오지 않자 머리에서 김까지 나는 것 같았다.
그런 내게 친절하게 웃으며 설명하시던 소방관님이 갑자기 비상벨이 울리자 표정이 변한다.
"잠깐만요. 출동이 있어서 다녀올게요." 하고 사라지셨다.
그분의 부재가 내게는 곧 휴식이었지만, 기분이 뭔가 떨떠름했다.
그리고 연극이 끝나고 우리 단원들에게 소방서의 이곳저곳을 보여주신 덕분에 그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서울 전체를 스크린 할 수 있는 상황실, 그리고 실시간 모니터링되고 있는 이런저런 사건들.
이곳에서의 비상벨이란 누군가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일 수 도 있는 것이었다.
늘어서 있는 소방차·구급차들의 종류가 많은 것도 신기했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방화복의 무게였다.
살짝 받아 들었는데, 들고 있던 양손이 밑으로 훅 꺼진다.
현역 군인이었던 시절, 5kg 조금 더 나가는 방탄복을 착용하고 수색작전했을 때도 이 정도의 느낌은 아니었다. 너무 놀라서 무게가 얼마냐고 물어보니, 30kg이란다. 일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옷을 입고 움직이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피곤하다 구시렁대던 것도, 심폐소생술 연습에 지쳐 나가떨어질 것 같다고 중얼거리던 순간들도......
누군가 그러더라. 소방관들은 불만 보면 미친 듯 뛰어들어가서 '불나방'이라고.
나는 오늘 정말 정성을 다했던 걸까? 우리 극단 이름 '불나방'을 부끄럽게 만든 건 아닐까?
'불나방'이 '불나방'을 만난 밤,
나는 이상히도 마음이 무겁다.
그 마음 덜어보려 매니저 소방관님에게 "고생하셨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고 돌아서본다.
그리고 작은 '헌시' 하나 써 본다.
<불나방>
붉음이 피어오를 때
뛰어듬은
잃기 위해서가 아니다.
살기 위해서다.
살리기 위함이다.
빨갛게 달아오른 불길 속으로
푸른 生을 향하여
날갯짓한다.
불나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