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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May 19. 2022

서울병

나는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다.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부임지에서 태어나 생후 2주 뒤 정선으로 이사 갔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시간부터 우리 집은 늘 서울이었다. 서울에서 초, 중고, 대학교, 대학원을 마쳤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은 양평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지만 나는 여전히 서울에서 살다. 그러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경기도로 이사다.

 

낯설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야말로 人生地不熟      

                                                                                                                                            남편의 직장이 이곳이고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기로 했었기 때문에 서울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수원으로 이사 간다고 하니 대학원 선배가 그렇게 서울을 떠나면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기 힘들 것, 이라고 호언장담했었다.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내가 이사 오고 싶으면 언제든 오면 되는 것을, 뭐 그렇게까지 쐐기를 박냐고.

그리고 아이가 16살이 된 지금까지 난 수원 근처, 경기도 어느 도시에 살고 있다.

선배의 말이 맞았다. 한 번 서울을 벗어나면, 직장이 서울이 아닌 이상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어느새 경기도의 생활이 편한 경기도 사람이 되어있었다. 물론 가끔 친구들을 만나러, 동기를 만나러 서울에 가기도 했지만 아이가 유치원 혹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와야 하는  신데렐라가 되는 기분이었다.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리는 듯한 느낌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서울을 다녀오면 몸이 고되다 느꼈고 제아무리 서울이 좋아도 역시 우리 집이, 내가 사는 경기도가 최고라는 생각뿐이었다.


外面千好万好,都不如自己家好 

밖이 제 아무리 좋아도 내 집이 최고!


그러다 코로나가 터지고 2년 동안 서울을 나갈 일이 없었다. 친구를 만나는 건 물론이요, 결혼식도, 서울 사는 언니네 집을 방문할 일도 없었다. 그러다 올 3월 말 확진을 받고 격리가 해제되면서 난 마치 오랜 감금 생활을 끝낸 올드보이처럼 자유인이 되어 꽤 자주 서울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서울을 다녀올 때마다 나는 서울병에 시달렸다.

"너무 좋아, 서울 진짜 너무 좋아. 오늘은 직접 운전해서 광화문에 다녀왔는데, 세상에! 탑 클라우드 뒤쪽에 있던 낡고 낮은 건물이 어느새 삐까뻔쩍한 큰 건물로 바뀌어 있더라니까!"

연신 감탄을 쏟아내며 서울에 살고 싶다고, 아이가 운 좋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면 난 꼭 서울 가서 살겠다고 남편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지난 주말 옆 동네 백화점에 놀러 갈 기회가 생겼다. 작년에 오픈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섣불리 갈 생각을 하지 못한 터였다. 우리 동네 근처에 있는 백화점과 달리 뻥 뚫린 시야와 널찍한 환경에 반하게 될 거라는 동네 아줌마의 전언이 있었지만,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몰랐다. 정말 그렇게 좋을 줄. 그렇게 넓을 줄. 그렇게 고급스러울 줄.

좋았다. 그냥 좋았다. 난 예전부터 호텔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게 있었는데, 식당가는 마치 서울의 어느 오성급 호텔에 와 있는 듯한 고급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좋았다. 깨끗하고 널찍했다.

남편의 손을 잡고 가면서도 '여기 너무 좋아, 서울 같아. 정말 서울 같아. 서울 살고 싶어. 아. 또 서울 가고 싶어.'라고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른다.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보면 경기도민의 삶의 애환이 드러난다. 멀고 험난한 출퇴근 길이 세 남매에게는 늘 가장 큰 숙제다. 차를 사고 싶지만 그럴 여력도 못 된다. 사실 우리 집에서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울의 어느 회사에 간다 하면 한차례 이상의 환승은 기본일 것이다. 드라마 속 배경처럼 한적한 시골 같은 경기도권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 서울은 아니다.


나는 평생 서울에서 살 줄 알았다. 서울에 살면서 잠실 롯데백화점에 가고, 잠실 야구경기장에 가고, 대학로의 연극을 보고, 광화문에서 친구를 만나는 게 일상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경기도로 와보니 대학 선배의 예언처럼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딱히 돌아갈 이유가 없었고, 또 간다 해도 서울의 집값은 지금 우리 집의 두 배 이상 올라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보다 치열한 교육열이 날 더 주저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없었다. 그 곳에서 내 아이를 키울 자신이. 그리고  행복해질 자신이.

사실 난 지금 내 집이 좋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가 좋다. 적당히 여유롭고 적당히 경쟁하는 이곳이.

하지만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서울병이 도지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마냥 서울에서 살고 싶다. 오래전 미련 없이 그만두고 온 내 첫 직장이 그리워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 인생의 반평생을 보낸 곳에 대한 그리움인지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 끝에 늘 하나마나한 질문이 뒤따른다. 아이를 낳고 서울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아파트를 샀었더라면, 내가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정말 그랬더라면 난 어땠을까?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지금보다 삶이 더 여유로워졌을까? 윤택해졌을까?

그랬을까?


이 무의미한 가정에 정답은 없다. 나도 모르고 당신도 모른다.

그저 나는 다시 도진 서울병에 시름시름 앓을 뿐이다.

언젠가는 내가 다시 서울로 입성하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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