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은 했었다. 중간고사 전부터 같이 스터디 카페를 다니고 시험 기간 내내 개인 톡을 주고받고. 시험이 끝난 뒤 신나게 무리 지어 놀러 다니는 걸 보고, 아하. 아들의 연애가 곧 시작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고 일주일 남짓 지난 어느 월요일.
학원을 다녀온 아들이 씩, 웃으며 다가온다.
- 엄마, 내 카톡 프로필 좀 봐.
- 응? 뭐? 똑같은데?
- 아니, 자세히 봐봐.
아들의 프로필 상단에 어제까지 없는 뭔가가 생겼다.
♡+1
-어? H랑 이제 연애 시작인 거야?
아들은 말없이 비실비실 웃기만 한다. 짜식. 엄마 속은 문드러지는데 아주 좋아 죽는구나.
하. 그렇게 중3 아들의 연애가 시작됐다.
우선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축하해'라고 등을 쓰다듬어줬다. 첫 연애를 축하하고, 서로 배려하며 즐거운 추억 많이 쌓으라고. 그리고 한마디 당부하자면 연애도 좋지만 다른 생활과의 '균형'을 잘 지켜달라고.
다행히 아들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남중, 남고, 공대 출신의 아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난색을 표했다.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자 길게 한숨을 내쉰다. 치, 내가 그렇게 걱정할 때는 웃어넘기더니. 꼴좋다.
- 왜? 연애한다니까 싫어? 그래도 우리한테 말해준 게 어디야.
- 아니, 하. 요즘 애들은 정말 빠르구나. 하 참, 연애를 하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어쩔 줄 몰라한다.
사실 나도 그랬다.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했지만 심란했다. 솔직히 정말 그랬다. 학업은 둘째치고 그냥 더 많은 이성, 동성 친구들과 놀았으면 좋으련만. 벌써 연애를 하는 건 시기상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포함 절친 다섯이 있는 단톡방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경사가 났다며, 우리 OO가 드디어 연애를 시작하는구나, 이모는 찬성이다, 다 컸구나, 이제 너는 아들을 놔줘라! 네 아들이 아니다, 다른 여자의 남자다! 등등 나의 염장을 지르는 응원의 글이 쇄도했다. 이것들아. 남 속도 모르고. 그나마 우리 중 가장 먼저 결혼해 대학생 아들을 둔 K만이 '심란하지?'라며 내 마음을 알아줬다. 그래. 너 때문에 산다.
다음날,
우리 가족은 나들이에 나섰다. 예전부터 제부도로 놀러 가기로 약속했었기 때문에 아들은 순순히 따라나섰다. 오늘이 연애 2일 차임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아들의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다. 아들의 여친을 포함한 혼성그룹은 볼링을 치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가족과의 선약을 깨면 엄마에게 밉보일까 따라나서긴 했지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나 역시 그 표정이 마뜩잖았지만 따라와 준 것만으로 기특해 아들에게 카톡 이모티콘을 선물로 보냈다.
- 아들, 앞으로 연애할 때는 이런 귀여운 이모티콘이 필요할 거야. 잘 써!
그제야 아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친과 썸을 타고 있던 어느 날, 아들은 제 이모티콘은 다 웃긴 것만 있다고 투덜댄 적이 있었다. 왜 귀여운 이모티콘이 없냐고 말이다. 아들의 카톡 이모티콘은 대부분 내가 선물해 준 것들이었다. 얼굴이 크고 머리숱이 없는 캐릭터는 정말 우스꽝스러웠다. 세밀한 표정 묘사와 엉뚱한 행동에 둘이서 낄낄대며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이모티콘이 부끄럽다니.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지만 어쩌랴. 온 세상이 핑크 핑크한 연애사에 우스꽝스러운 이모티콘은 영 어울리지 않았을 테니까.
아들의 연애는 현재 진형 중이다.
근데 생각보다 너무 별거 없는? 연애에 오히려 내가 실망이다.
중학생이라 그런가? 따로 통화도 안 하는 것 같고, 단둘이 만나는 일도 거의 없다. 원래 연애의 시작은 자기 전까지 붙들고 있는 전화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한 치열한 눈치싸움이 정석 아니었던가?
아이에게 슬쩍 물었다.
- 혹시... 그냥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아니, 따로 통화하는 것도 없고, 둘이 만나지도 않는 것 같아서.
- 어, 잘 지내. 학교에서 매일 보는데 뭐. 카톡도 자주 해.
- 아. 카톡... 그래 잘 지냈으면 됐어.
아들아. 과연 그걸로 될까? 뭔가 한숨이 나오면서도 안도가 되는 이 복잡 미묘한 기분.
아이는 연애보다는 배드민턴 시합 준비가 먼저인 듯했고, 무리와 놀고 온 주말에는 게임은 하지 않겠다며 선언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내 예상과 다른 전개에 짐짓 놀랐지만 그래도 내가 부탁했던 '균형'을 잘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 내심 대견했다.
사실 아들이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었다. 어떤 대화가 오고 가는지,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떤지.
하지만 아들이 연애를 선포한 그날부터 난 아들의 핸드폰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이제는 지켜줘야 할 것 같았다. 아들의 사생활을, 아들의 연애를.
내 아들이 아닌, 한 남자, 한 인격체로 대우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 핸드폰 안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眼不见,心不烦
yǎn bù jiàn , xīn bù fán
모르는 게 약일 테니까.
비록 지금 하고 있는 게 '연애'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건조한 생활을 보내고 있지만 요즘 중학생은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하고자 한다.
어제 유퀴즈에 나온 심리학자분의 말씀이 가슴에 와닿았다.
부모는 자녀의 행동을 보며, 제 기준에 맞춰 '왜 저러는 거야? 나 때는 안 그랬는데?' 하며 자꾸 설득하려고 한단다. 하지만 그건 자녀와의 갈등을 심화시킬 뿐,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 대신 자녀를 대할 때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대해보란다.
- 아, 요즘 젊은 애들은 그러고 노니? 너는 그게 재미있니? 아, 그렇구나.
맞다.
내 기준으로 아이를 재단하지 말자. 내 기준은 이미 30년도 지난 구닥다리이다.
아이의 행동이 규범에 크게 어긋나는 게 아니라면 할머니처럼 지켜보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 싶다.
- 아, 요즘 네 생각은 이렇구나. 아, 너의 연애는 이렇구나. 이게 요즘 방식이구나!
나이가 들고 흰머리가 나는 건 속상했는데 마음가짐은 좀 더 나이를 먹어도 되겠다 싶다.
사춘기 시기인 만큼 당분간 할머니 모드로 지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