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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밀당의 고수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

by 김대군

빙산의 일각


빙산은 10%만이 수면 위로 솟아 있고, 진짜 힘을 담은 90%는 바닷속에 묵묵히 잠겨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자신의 글쓰기 스타일을 ‘빙산 이론’에 빗대며,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10%의 문장이고 나머지 90%의 생략된 ''이 글의 무게를 만든다고 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가 인지하는 ‘의식’은 10%에 불과하고,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진짜 힘은 보이지 않는 90%의 ‘무의식’에서 온다고 통찰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인류는 이 은유가 우주 전체에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하는 별과 은하, 행성과 성운, 그리고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우주’라고 인지해온 모든 물질은 사실 우주 전체의 단 5%에 불과한, 거대한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우주의 모든 것을 지탱하는 저 수면 아래의 거대한 95%는 무엇인가?


그곳에는 인류가 이제껏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두 명의 거대한 ‘고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모든 것을 끌어당겨 우주의 구조를 만들려는 ‘암흑물질(Dark Matter)’과, 모든 것을 밀어내 시공간을 팽창시키려는 ‘암흑에너지(Dark Energy)’가 바로 그들이다.


우리는 이제 막 그들의 존재를 희미하게 감지했을 뿐, 그들의 분명한 정체도, 의도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암흑'이라는 임시 이름표를 붙여준 것뿐이다. 우리는 우주라는 거대한 빙산의 95% 앞에서 이제 막 눈을 뜬 어린아이와 같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


우리 은하는 초속 270km로 빠르게 회전한다. 이때 별들이 은하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도록 꽉 붙잡아 당기고 있는 미지의 물질을 암흑물질이라고 이름 붙였다.


암흑물질은 우주라는 건축물의 보이지 않는 뼈대이자, 모든 것을 제자리로 끌어당겨 질서를 부여하는 힘인 셈이다.


태초의 우주에서 암흑물질이 먼저 중력으로 뭉쳐 ‘씨앗’이 되자, 그 강력한 인력에 이끌려 일반 물질들이 모여들어 별과 은하를 만들어냈다.


이 보이지 않는 건축용 비계가 없었다면, 모든 물질은 뿔뿔이 흩어져 우리는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암흑물질은 우주물질의 27%를 차지하고 있다.


1024px-Gravitationell-lins-4.jpg 허블 우주망원경이 관측한 은하들 사이에서 빛이 휘는 강력한 중력렌즈 효과는 암흑 물질의 존재를 나타낸다.

By NASA, N. Benitez (JHU), T. Broadhurst (Racah Institute of Physics/The Hebrew University), H. Ford (JHU), M. Clampin (STScI), G. Hartig (STScI), G. Illingworth (UCO/Lick Observatory), the ACS Science Team and ESA - http://hubblesite.org/newscenter/newsdesk/archive/releases/2003/01/image/a,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727600 출처 위키백과



한편, 빅뱅으로 우주가 팽창하고 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팽창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관측 결과, 우주의 팽창은 오히려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이처럼 우주 공간 자체를 팽창시켜서 모든 것을 서로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미지의 척력(斥力)을 암흑에너지라고 이름 지었다.


암흑에너지는 우주물질의 68%를 차지한다.


250px-Dark_Energy.jpg 암흑 에너지로 인한 우주의 가속 팽창을 나타내는 다이어그램. 출처 위키백과


암흑물질이 구조를 안정시키려는 힘이라면, 암흑에너지는 끊임없이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려는 힘이다.


이 두 암흑의 고수들이 끊임없이 우주의 물체들을 끌어당기고 밀어내면서 138억 년의 우주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 초기에는 암흑물질의 힘이 더 강했지만, 약 50억 년 전부터 암흑에너지의 밀어내는 힘이 우세해지면서 우주는 가속 팽창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빙산의 보이지 않는 90%가 빙산을 지탱하듯, 우주의 보이지 않는 95%는 우리를 존재하게 한다.



우주라는 이름의 바둑판


바둑판의 설계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고대의 우주관과 관계가 있다.


바둑판의 사각형 모양은 안정되고 변치 않는 '(地)'을 의미하고, 흑과 백의 둥근 바둑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하는 '하늘(天)'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둑판 위에 돌을 놓는 행위는, 네모난 땅 위에 하늘의 뜻을 펼쳐나가는 것으로 비유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 판의 바둑은 흑과 백이 ‘밀당’을 하며 만들어가는 우주의 장엄한 대서사시인 셈이다.


어쩌면,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신의 바둑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판의 95%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黑)의 세력(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이 장악하고 있다.


인류가 이제껏 쌓아 올린 모든 과학적 지식은, 그저 판의 한 귀퉁이에서 5%에 해당하는 백돌(白石) 몇 점을 놓고 벌이는 작은 부분 정석(定石)에 불과했다.


우리는 이 작은 정석의 수순을 외우고 그 변화에 감탄하는 동안, 판 전체를 지배하는 흑의 거대한 의도와 행마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상황은 2016년, 한국의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국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입신'의 경지에 오른 기사들조차 판 중앙의 복잡한 형세 판단을 ‘(感)’에, ‘반 집’의 미세한 승부를 ‘(運)’에 기대곤 했다.


그러나 알파고는 그 모든 것을 냉정한 ‘계산’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인간의 직관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과학의 역사 또한 이와 같았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은 물, 불, 흙, 공기라는 4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며, 눈에 보이는 백돌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거대한 ‘’의 체계를 세웠다.


그 후 뉴턴과 아인슈타인이라는 ‘인간 알파고’가 등장하여 수학적 ‘계산’으로 우주에서 우리에게 보이는 5%의 빛(백)의 세계를 지배하는 명쾌한 규칙을 찾아냈다.


Albert_Einstein_as_a_child.jpg 1893년 아인슈타인의 14세 때 모습

By 미상 - http://faculty.randolphcollege.edu/tmichalik/einstein.htm,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850884 출처 위키백과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들의 위대한 계산조차, 거대한 흑의 바둑판을 배경으로 한 백돌 몇 점의 행마법에 대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95%의 흑돌이 지배하는 판 앞에서, 우리의 최첨단 과학 이론들마저도 어둠의 실체를 가늠해 보려는 정교한 형태의 또 다른 ‘’ 일지도 모른다.


지금 인류는 우주라는 바둑에서 흑의 존재를 막 깨달은 ‘수졸(守拙)’의 단계에 있다. 이제 막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졸렬했는지를 깨닫고 겸허한 마음으로 배움을 시작했을 뿐이다.




블루오션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우리는 우주를 지배하는 힘의 95%에 대해 완전히 무지합니다. 다음 세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바로 이 어둠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고개를 드세요. 진짜 우주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의 겸허한 자각인 동시에, 미래 세대를 향해 무한한 블루오션이 펼쳐져 있음을 귀띔해 주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해안선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건너기 전까지, 당신은 결코 새로운 대양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콜럼버스는 ‘해안선’이라는 5%의 세계를 출발하여 미지의 오션(대양)으로 나아가, 결국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


우리의 과학도 기존의 5%의 앎을 바탕으로 95%의 미지의 암흑세계에 대한 탐험을 시작했다. 언젠가 새로운 물리 법칙이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둑은 ‘한 수’의 가치를, 인생은 유한하게 주어진 ‘시간’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여정과 같다.


인생이라는 대국을 승리로 이끌 신의 한 수는 무한하게 펼쳐진 미개척지라는 블루오션에 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이 세상을 내쪽으로 당겨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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