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개서
보이저호의 골든 디스크
아버지 뭐하시노?
과거에는 자기소개서(자소서)랄 것도 없었다. 입사지원서에 그저 학경력과 키, 몸무게, 혈액형 등 인적사항과 취미와 특기, 입사지원 동기를 적어 넣으면 된다.
여기에 타자 급수, 운전면허증, 태권도 단증, 영어회화 가능 등 몇 가지 자격증 칸을 채울 수 있으면 더 좋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가족관계에 부모님 직업을 넣어야 한다. 고심 끝에 아버지는 ‘농업’이다. 그때는 아버지 직업이 공무원, 교사이면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 시절 자소서의 키워드는 어느 학교 나왔니? 아버지 뭐하시노? 였다.
신입직원 면접관이 되어본 적이 있다. 여러 자소서들 중에서도 ‘간결’하면서도 ‘스토리’를 담고 있는 지원자들이 눈 길을 끌었다.
아인슈타인은 “만약 당신이 그것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지원 에세이에서 한 학생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묻는 질문에 '그리고(And)'라고 답했다.
이 학생은 평범한 단어를 선택했지만, 이 단어가 '물리학 그리고 문학', '기술 그리고 인류애' 등 서로 다른 분야나 가치를 연결하고 확장하는 가능성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단순한 단어 하나에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학문적 포용력이라는 핵심 가치관을 응축시키고, 그의 지적 호기심을 담은 독특한 스토리를 통해 평가자를 매료시켰다.
학생도, 그 것을 알아 본 평가자도 모두 훌륭하다.
인류(人類) 소개서
미국 NASA는 총 4개의 우주 탐사선에 인류와 지구의 정보를 담은 ‘인류의 자기소개서’를 부착시켜 태양계 밖으로 날려 보냈다.
1972년과 1973년에 발사된 우주 탐사선 파이오니어 10호와 11호에는 '골든 플라크(Golden Plaque)'라는 알루미늄판(가로 23cm, 세로 15cm) 이 부착되었다.
여기에는, 우주 지도인 ‘펄사 지도’가 그려져 있다. 태양을 중심으로 뻗은 14개의 선은 펄사라는 별을 가리킨다. 이 지도를 통해 외계인은 태양계의 위치와 탐사선의 출발 시기를 계산할 수 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나체 그림을 그려 넣어 인류의 기본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탐사선과 함께 그려져 있어 인간의 신장을 가늠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우주에 가장 흔한 원소인 수소 원자의 속성을 다이어그램(그림)으로 나타내, 우주의 보편적인 시간과 길이의 단위를 제공했다. 이 척도를 바탕으로 골든 플라크의 내용을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류의 인적사항과 주소, 해독(解讀) 열쇠가 수록되었다.
우주의 침묵과 400년의 시간
파이오니어호에 부착된 그림. 좌상단에 수소 다이어그램, 밑으오 펄서지도, 우측에 사람과 우주선, 아래쪽에 태양과 행성들.By Designed by Carl Sagan and Frank Drake. Artwork prepared by Linda Salzman Sagan.Photograph by NASA Ames Research Center (NASA-ARC) - Ames Pioneer 10,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31429 출처 나무위키
1977년 발사된 보이저 1호와 2호에는 '골든 레코드(Golden Record)'가 실렸다. 지름 약 30cm 크기의 이 금도금 구리 레코드판은 '지구의 소리'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 레코드에는 천둥, 비, 바람, 고래 노랫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 한국어 "안녕하게요?"를 포함한 55개 언어의 인사말, 그리고 바흐, 베토벤 등 다양한 문화권의 음악이 담겼다.
116장의 사진 정보에는 DNA 구조, 인간의 모습, 지구의 풍경 등 인류 문명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포함되어 있다.
레코드 반대편에 새겨진 그림들은 외계인이 레코드를 해독하기 위한 열쇠이다. 파이오니어호의 금속판처럼 수소 원자 다이어그램과 펄사 지도를 통해 지구의 위치와 제작 시기를 알려주었다.
레코드를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재생하는 방법도 그림으로 안내하고 있다.
이 자기소개서에는 인적사항, 주소, 해독 열쇠와 더불어 인류와 지구에 대한 스토리가 실려 있다.
보이저호 골든 디스크. 사용설명서, 펄서지도 등이 표기됨. 뒷면은 LP레코드판임. By NASA/JPL - The Sounds of Earth Record Cover,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37443 출처 위키백과
하지만, 이 네 척의 우주선들이 초속 17km가량으로 날아가고 있지만, 가장 가까운 별에 도달하는데 만도 몇 만년이 걸릴 것이다.
아마도, 바닷가에 밀려온 병 속의 오래된 편지처럼, 먼 훗날 어느 행성에 도달할지도 모르겠다.
소통(疏通, Communication)의 열쇠
이집트 상형문자(Hieroglyphs)는 기원전 3200년경부터 고대 이집트 문명 전반에 걸쳐 약 3,500년가량 사용되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서기 4세기 후반경 사용이 중단되었다.
이후 해독법이 실전(失傳)되어 1400년 이상 미지의 문자로 남아, 이집트 고대사 연구에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시 로제타 지역에서 이집트 상형문자가 적혀 있는 비석, ‘로제타석(Rosetta Stone)’을 발견했다.
기원전 196년에 제작된 이 비석은 이집트의 상형문자, 민중 문자, 그리고 고대 그리스 문자라는 세 가지 문자로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어, 서로 비교하며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비석의 주된 내용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사제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을 찬양한다는 내용이다.
로제타 석이라는 해독 열쇠의 발견으로 고대 이집트 역사와 소통이 가능 해졌다.
한편, 우주로 보낸 자기소개서에는 두 가지 소통의 열쇠가 담겨 있다.
하나는, ‘펄서 지도’와 ‘수소 다이어그램’ 등 과학의 기본 법칙이다.
우주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라 믿어지는 과학적 원리를 통해, 최소한의 논리적 단서를 제공하려는 시도였다.
아마도, 현재의 인류 문명 수준의 외계문명이라면 해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감정의 우주적 보편성에 대한 호소이다.
과연, 바흐 음악의 장엄한 ‘아름다움’이 그들에게도 같을 것인가? 아기의 울음소리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골든 디스크는 ‘그들도 그럴 것이다’라는 인류의 지성과 감성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지적 ‘자소서’이다.
자소서를 쓰자
자소서는 글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흔히 '50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처럼, 얼굴은 가장 즉각적이고 압축적인 '자소서'이다.
버스 옆자리에 앉을 때, 처음 만나는 모임에 들어설 때 이미 첫인상이라는 나의 자소서가 제출되는 것이다.
여배우 오드리 헵번은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라.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만 하라. 그리고 균형 잡힌 자세를 가지고 싶으면, 당신이 결코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며 걸으라.”며 ‘행동 자소서’ 잘 쓰는 방법을 알려준다.
또한, 자소서는 특정 시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모임에서 갑작스럽게 요청받는 '한 말씀' 속에는 나의 논리와 철학이 응축되어 타인에게 전달된다.
업무를 대하는 성실함, 위기 상황에서 보여주는 침착함, 동료와의 협력에서 드러나는 배려심은 그 어떤 스펙보다 강력한 '행동 자소서'이다.
이 모든 것이 세상이라는 넓은 '평가 기관'에 제출되는 나의 평생 기록이 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자소서는 남이 아닌, '가족'에게 쓰는 것이다.
퇴직 후 부부가 집에 같이 지내다 보니 서로 미처 몰랐던 부분을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고들 한다.
수십 년을 살았어도 서로 자기소개가 잘 안 된 것이다.
보이저호가 우주의 침묵을 향해 '수소 원자와 바흐의 음악'이라는 고심과 신뢰에서 나온 키워드를 던졌듯이, 우리도 서로 진솔한 키워드를 찾아 자기소개서를 써보자!
그리하여, 먼 훗날 인류의 자소서를 받아본 외계문명이 인류의 부모님들이 훌륭했다는 것을 느끼게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