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글
회사에서는 늘 밝은 얼굴로 누구보다도 씩씩한 사람이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제일 먼저 '할 수 있어. 이건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야.'라며 용기를 북돋워 주는 사람이었다. 그랬다. 얇은 블라우스에 두툼한 니트카디건을 걸치고 55도 정도의 라테를 좋아하고 계절에 따라 돋보이지는 않지만 뒤처지지 않는 패션 감각을 지켜 나가며 늘 사람들의 시선에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하던 사람. 그래도 본인을 사랑한 나머지 꼭 좋은 유기농 마트에 가서 신선한 채소와 과일 그리고 생선을 잔뜩 사서 요리하려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 사람의 집은 회사에서 이십오 분쯤 차를 타고 이동하면 걸리는 거리였다. 회사도 집에서 적당한 거리였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혼자 숨을 수 있는 적당한 거리. 집에 돌아오는 길은 불빛이 휘영청 거리는 가로등을 몇 개 지나고 어두컴컴한 골목에 숨겨진 손님이 얼마 없어 언제쯤 문을 닫을지 걱정하게 만드는 작은 에스프레소바를 지나 이십 년 전부터 있었던 가락국수집을 지나 큰 사거리를 돌면 나오는 곳이었다.
탁.
장바구니를 내려놓는 소리도, 불을 켜는 소리도 아니었다.
적막한 공간에 그 사람의 가라앉은 마음을 펼쳐놓은 듯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리며 겨우 신발을 벗고 문 앞에 주저앉아 우는 소리였다. 그 사람은 절절한 마음에 무언가를 깊이 되뇌며 속삭였다. '선하게 선하게 선하게...' 그 사람의 마음 가득히 옥죄이고 있는 말이었지만 그냥 그렇게 반복해서 입으로 내뱉는 말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알 수 없지만 그냥 그 행동이 그냥 위로가 되듯이 몇 번을 되뇌더니 이내 울음은 가까스로 삼킬 수 있었다.
중학교 때도 그 사람은 가끔 죽음을 생각했다.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산속에서 운영하는 카페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하며 아빠의 퇴직금을 써 버렸는데 그게 시발점이 되었다. 경기는 어려워졌고, 사람들은 산속에까지 찾아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혼자 카페를 지키며 커다란 셰퍼드를 키웠다. 사람이 오지 않는 카페에 아버지는 탁자를 쉼 없이 닦아냈다. 먼지가 쌓일 시간도 주지 않고 늘 그 시간에 그렇게 탁자를 정리해 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어머니도 그중에 하나였다. 갈등의 골은 깊어져 갔고 부채는 늘어갔다. 카페를 정리해야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크게 언쟁이 있었다. 그 사람은 그냥 중학생일 뿐이었고 늘 눈을 감으면 다음날이 오지 않길 바라며 잠들었다. 어느 날은 좀 더 직접적인 방법이 필요했는지 아무도 없던 조용하고 평화롭던 집에서 약을 하나 꺼내 들었다. 겉면에는 어떤 약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중학생이던 그 사람은 그냥 몇십 알을 삼켰다. 시간이 좀 지났을까 꿈인 줄 알았다. 꿈에서도 부모님은 아직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오랫동안 잠든 것 같은데 깨어나니 비타민을 십몇 알을 삼켰던 것을 알았다.
집안에는 아직도 불을 켜지 않았다. 장을 봐온 야채와 생선은 가지런히 문 앞에 두고 그 사람은 두 다리를 감싸 안은채 어둠 속에서 눈이 밝아지기를 기다리듯 그냥 멈춰있었다. 집에 신호등이 있었다면 아마도 뒷 차들이 경적을 여러 번이나 울렸을 법했던 시간이다. 시간이 멈춰 있었지만 시계는 제대로 작동했다. 째깍째깍 시간은 원래 그렇듯이 잘 흘러갔다. 그 사람은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늘 슈퍼맨처럼 팀을 이끌어 가는 소위 S급 인재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냥 소리 없이 흐느껴 울면 조금 속이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이런 모습은 아무도 몰랐다. 저녁시간이 늘 비어있던 그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감추고 싶은 비밀처럼 깊은 서랍에 넣어둘 본연의 모습을 유화로 덧칠하듯 여러 가지 색을 덧입혀 꽁꽁 싸매 두었다. 들키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도 그 사람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단 한 명 그 모습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직까지 들키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302호에 사는 옆집 사람은 그 사람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늘 사 오는 장바구니는 손에 들려 있지만 요리하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문이 열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는 깊은 암흑 속으로 흘러가듯 블랙홀에 소리가 빨려 들어가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옆집. 그런 옆집 사람에게 어느 날 집 앞에 화분을 갖다 두었다. 스킨답서스. 어둠 속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이었다. 그 집에 살아있는 무언가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며칠간 지켜보았지만 스킨답서스는 집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차가운 복도에서도 그 사람을 기다리며 스킨답서스는 꼿꼿이 이파리를 내밀며 구원해 주길 바라는 아기양처럼 목자를 기다렸다. 다음날 옆집 사람은 쪽지를 하나 써서 붙여 두었다. '빛이 없어도 자랄 만큼 생명력이 강한 아이예요. 부디 예쁘게 키워주세요.' 그 집에 숨을 쉬는 식물이 하나라도 들어가면 블랙홀처럼 잠긴 그 집 문이 열리며 식물원처럼 변할 것 같은 소망에서였다. 옆집사람은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력서에 장식할 무언가는 없었지만 그래도 받아준 회사에 성실하게 매일매일 출근했다. 회사에서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사람의 자리가 아쉬운 곳이라 옆집 사람은 겨우겨우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런 옆집사람이지만 삶의 의욕이 없지는 않았다. 오며 가며 맞은편 그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정도는 궁금해하는 사람이었다.
다음날 출근하려고 집을 나선 옆집 사람은 그 사람의 집 앞에 식물이 없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적어도 그 생명력이 가득한 식물이 그 사람의 호흡을 조금이라도 내 쉴 수 있는 산소를 제공해 줄 수 있다면, 적어도 바이탈 반응이 나타나는 순간들을 맞이했을 거라 상상했다. 기분이 좋았다. 순간 그 사람 집의 문이 열렸다. 생기 없이 하얀 얼굴에 긴 머리를 미처 말리지 못한 듯한 물기가 조금 엉기어 있는데 옆집사람을 보고 준비했다는 듯 "고맙습니다. 덕분에 식집사가 되었어요."라고 뜬금없는 말을 뱉었다. 옆집사람은 상투적인 반응을 보고 질릴 법도 했지만 옅은 미소로 알아볼 수도 있는 애매한 표정의 그 사람을 쳐다보지는 못한 채 "예에, 식물이 좋을 것 같아서요."하고 주변머리 없는 말투로 인사를 얼머부렸다. '아차차 내가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닌데...' 어차피 전하지도 못 하는 말이었다. 옆집사람은 그냥 성실한 사람이었다. 꿈이라는 것도 없고 그냥 살아야 해서 사는 사람이었다.
길지 않은 대화가 빨리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 사람을 두고 옆집사람은 급히 계단으로 내려갔다. 적지 않은 나이의 남녀의 대화 치고는 싱겁게 끝나버렸다. 아무 의미 없는 대화 속에 무언가 진전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옆집 사람의 마음이 알량하게 보일까 봐 그도 모르게 다급함으로 바뀌었다.
그날 밤. 옆집사람의 집 앞에는 쪽지가 하나 있었다. '아보카도 좋아하시면 샌드위치 드시러 오세요.' 반듯하게 쓰여있는 글자에서 그 사람의 품성을 알 것만 같았다. 인적 없는 어두컴컴한 그 집에 초대받으면 나는 어떤 의상으로 가야 할지 거울 앞에서 연신 자신의 매무새를 다듬어 본다. 첫인사는 어떻게 할지, 혹시 잘 되게 되면 어떡하지 하면서 내심 설레면서도 성실하지만 특별한 매력은 없는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어필할지 그냥 생각만 해보았다. 그 사람이 보낸 쪽지가 맞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집 앞에 있는 쪽지는 나를 향해 있는 쪽지라고 생각했다. 당장에 옷을 갈아입고 너무 격식 있지도 너무 캐주얼하지도 않은 모노톤의 니트를 입고 그 집 현관 초인종을 눌렀다. 다시 눌렀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다시 한번 받은 쪽지를 읽어본다. 거기에는 몇 시에 오라고 써놓지는 않았다. 언제인지도 어디서 인지도 누구에게 보내는 건지도 아무것도 적혀있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