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눈물
겨울이 되면 생각나는 엄마의 눈물
겨울이 시작되면 어머니의 눈물이 생각난다.
엄마는 배움이 많지 않으신 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셔서 당시 흔히 말하는 소학교를 나오신 분이라고 생각되며 과거의 교육 직제가 어떤지 모르지만 지금의 중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엄마는 지혜로우신 분이 아니셨다. 아니 지혜로울 수가 없으셨다. 6남매의 막내인 내가 집안 사정을 제대로 알 수는 없었지만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다. 가난한 집에 이사 와서 아이를 6명 낳았고, 아버지의 수입은 너무 적었다. 아버지인 남편은 물려받은 재산이 없이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생활을 하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안 해본 직업이 없으셨으나 돈을 모으는 데는 실패하셨다.
술을 한잔도 할 줄 모르셨던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삶의 무게를 만만했던 어머니에게 퍼부었다. 폭력적 언사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마디도 대꾸를 하지 못하셨다. 너무나 순진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말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하셨고 바보같이 그 많은 폭언을 듣고만 계셨다.
나는 어머니가 욕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남에게는 물론이고 자식들에게도 욕을 한 번도 하시는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어머니, 즉 할머니는 가족이 이북에서 월남하셨던고 예의 바르시고 정말 반듯한 분이셨다. 외갓집은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외할머니가 자식을 다 건사해야만 했다. 다행히 외할머니는 하숙집을 운영하셔서 생계를 잘 꾸러 나가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욕에 한 번도 말대꾸를 하지 않으셨다. 가혹한 언어폭력이 이어졌지만 정말 바보처럼 가만히 계셨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전혀 대항을 하지 않으셨고 대항할 줄도 모르시는 분이었다. 모멸감을 느끼고 삶의 고통이 심할 때도 어머니는 오히려 싫다는 내색을 하나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 엄마를 아버지는 대 놓고 무시하고 욕을 해댔다.
집안에서 엄마의 위치는 매우 약했다. 그런 엄마를 돕기는커녕 막내인 나부터가 엄마를 무시하고 절대적 강자였던 아버지 편을 들었던 같다. 엄마는 집에서도 밥을 항상 늦게 먹었다. 가족들과 식사할 때도 있으셨지만 주로 물을 말아 드셨던 갔다. 아버지는 식사를 5분이면 마치는 그런 분이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엄마가 과일이나 간식을 드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정말 신기하게도 엄마는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 무언가를 드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엄마는 자식들인 우리를 위해 하나도 드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런 엄마와 함께 시장을 갔는데 딱 한번 나에게 꽈배기를 사 주 신 적이 있었다. 물론 어린 나는 꽈배기를 신나게 받아 들고 그때 딱 한번 엄마가 꽈배기를 드시는 것을 본 적 있었다.
그런 엄마가 평생 딱 한번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았다. 한 번은 아버지가 자전거를 빌려주고 돈을 받는 장사를 시작했다. 그 당시 귀했던 자전거를 30분이나 한 시간 빌려주고 돈을 받는 사업이 유행했다. 아버지는 빚을 내서 자전거를 샀고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하자마자 자전거를 빌려간 사람이 사고를 내버렸다. 아이를 크게 다치게 한 것이었다. 경찰관이 우리 가게까지 찾아왔는데, 아버지가 없고 마침 가게를 혼자 지키고 계셔던 어머니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셔는 지 당시 초등학생인 나를 보면서 "우리 이제 어떡하니!" 하시면서 큰 소리로 우시기 시작하셨다.
그 일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모르지만, 세월은 흘러 자전거 대여업을 접고 아버지는 다른 장사인 음식점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고 항상 우리 집은 돈 때문에 시달렸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고생만 하셔던 어머니는 병환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그 뒤를 이어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앞에서 말한데 못하셨던 순둥이 엄마는 자신을 평생 표현하신 적이 없었다.
지금도 살아 계신다면 "엄마 말 좀 하셔요"라고 하고 싶다.
문득 찬바람이 센 겨울이 되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눈물이 생각난다.
또한 그런 어머니의 눈물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나는 자면서 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림출처 :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