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아 고 조영래 변호사님을 기억하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생각을 알게 된다. 그 중에서 존경하는 분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큰 기쁨과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연말을 맞이하여 한 해를 보내면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사실 우리가 존경할만한 분들은 주위에 너무나 많다. 가족 중에서 찾을 수 있고, 가까운 곳에서 계신 분 중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학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중에서도 학문(법학)과 관련된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고 조영래변호사님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존경하는 분은 건국대학교 한상희 교수님이다. 사실 고 조영래 변호사님을 직접 뵙고 대화를 한 적은 없다. 법학공부를 하면서 돌아가신 조영래변호사님의 사상과 행적에 대해서 한상희 교수님이 알려주셨고, 조영래변호사님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가장 많이 연구하시고 계승하고 계시는 분이 한상희 교수님이라고 생각된다.
조영래 변호사는 유명한 인권변호사로 나 말고도 많은 분들이 존경하고 있다. 조영래변호사는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패스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갖게 되는 엘리트층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인권변호사가 되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이익부터 챙기고 그다음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하는 데 조영래 변호사는 그렇지 않았다.
변호사라는 위치에서 약한 사람들을 대리하여 우리 사회의 구조를 바꿀 수 있음을 인식하고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시작하였고,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소송으로 우리 사회의 구조를 바꾸기 시작했다. 특히 변호사님은 변론도 잘하지만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글을 잘 썼다고 한다. 서슬이 시퍼런 유신독재시절 전태일 평전을 써서 당시 노동자의 어렵고 힘든 현실을 대변하기도 했다.
특히 소송인 사법제도를 통하여 우리 사회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항공기 소음피해소송사건, 망원동유수지범람사건, 부천서 피의자성고문사건, 서울대조교성희롱사건 등에 참여하여 당시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건에 참여하여 참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권리의 침해라는 개념을 확립시켰다.
망원동유수지범람사건에 대해서는 그동안 천재지변이라고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주민들을 조영래 변호사는 설득하여 서울시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것은 국가를 상대로 낸 우리나라 최초의 집단 소송이었다. 조영래변호사는 많은 전문가들을 만나 조언을 듣고 생소한 건축 분야의 책을 밤을 새우며 읽으며 변론을 준비했다. 결국 1990년 재판부는 망원동 수재 사건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국가의 의무 소홀로 일어난 일이므로 국가가 그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부천서 피의자성고문사건이 일어나자 한숨에 달려가서 변호를 한 것이 1986년이었고 이듬해인 1987년 약자에 대한 폭력에 더이상 참지 못한 분노한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을 촉발시켰다.
이 사건 외에도 조영래변호사는 여성의 정년을 25세로 판결한 재판부에 항의하여 소송을 제기한 끝에 55세로 바꾸었다. 또 연탄공장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진폐증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국민들이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것이 바로 상봉동 진폐증 사건으로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환경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하늘이 사랑하는 사람은 일찍 데려간다고 고 조영래 변호사는 4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 세상에 완변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피해가 없다고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를 묵인하는 사람들에 포함되는 나부터 스스로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된다.
잠시지만 이렇게 존경할 분이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도 큰 영광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그 분의 발자취를 따라 좇아가고자 한다.
푸에토리코의 유명한 야구선수 로베르또 클라멘테는 이야기했다.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지상에서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우리 인생 한번 왔다 가는 데 삶은 모두 다른 것 같다.
찬바람이 세게 옷깃으로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