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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Nov 12. 2021

준이와 웅이

준이와 웅이 형제는 1학년 남자 쌍둥이였습니다. 형제의 집은 OO동에서도 하늘과 가장 가까운 언덕 꼭대기에 동그마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도 단독 주택이라 부를 만한 2층집이었는데,  슬레이트 철문 안으로 한 사람만 겨우 오를 수 있는 가파른 계단이 왼쪽으로 뻗어 있었고, 계단 끝으로 바로 작은 방이 이어졌습니다. 신발을 벗고 계단을 반쯤 오르면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준이 웅이 형제까지 네 식구가 몸을 비비며 사는 살림살이의 정겨운 냄새가 훅 끼쳐 왔습니다. 사계절 내내 담요로 무릎을 덮고 계단 아래를 내려다 보고 계셨던 할아버지에게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크게 인사를 하며 계단을 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옥상도 형제네가 썼는데 따로 난간도 없이 내버려 놓은 한 평 남짓한 아스팔트 바닥이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가 가져다 놓으신 작은 장독대 몇 개와 초록초록한 상추 화분이 당당히 그곳을 넘치는 삶의 공간으로 분하게 해 주었습니다. 내가 OO동 수업을 도는 금요일에 골목길을 바삐 뛰어다니면, 할머니는 그 옥상에서 무언가를 부지런히 하시며 멀리서도 나에게 알은 체를 하시거나, 준이 웅이의 행방을 오히려 묻기도 하셨습니다.


형제의 수업을 하러 집으로 향하는 길, 나를 발견하신 할머니가 옥상에서 어딘가를 향해 소리칩니다. "선생님 오신다! 얼른 뛰어와!" 할머니의 눈길을 따라가면, 가파른 언덕길로 통통한 아이들이 신발 주머니를 흔들며 뛰어 오고 있습니다. 1학년 아이들의 걸음은 한참을 뛰어도 계속 제자리 같았지만 헉헉대는 숨소리만큼은 점차 커지며 다가왔요. 아이들의 정수리에는 흙냄새가, 가방에서는 필통 달그락거리는소리가 났습니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씩씩하고 늘 밝고 경쾌했고, 그래서 아이들도 밝았습니다.  준이 웅이는 지난 자리를 환하게 물들이는 OO동의 마스코트였습니다. 조금은 늦되고 어눌했지만, 여덟 살의 순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너무나 예쁜 아이들이었습니다. 는 아이들을 힘껏 안아주곤 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저는 조금은 친근한 느낌이었습니다. 아이들의 교육비 출금 계좌 등록을 하며 어머니의 이름도, 나이도 알게 되었었는데, 저보다 어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아직 결혼도 못했는데 벌써 여덟 살 형제의 엄마라니!' 놀랐었지요.  할머니와 친해진 뒤에는 제가 묻지 않아도 자주 딸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아마 비슷한 또래의 딸같아서였을 것입니다. 머니는 지방 어딘가에서 돈을 벌고 있다고 했습니다. 두 아이의 적지 않은 회비가 어머니 이름의 통장에서 꼬박꼬박 한 번도 연체 없이 잘 빠졌었고, 저는 그 기록을 확인하며 아직 어린 나이의 엄마가 그래도 아이들을 위한 그리움의 시간을 견디고 있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했었습니다.


할머니가 딸 이야기를 하실 때 항상 썩을 년, 망할 년, 미친 년 온갖 험한 욕은 다 붙여 셨지만 당연히 단 한번도 진짜 미움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최근에 아몬드라는 소설을 읽으며, 나는 '썩을 년'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진한 정겨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답니다.) 딸 얘기 끝 정적이 올라치면, 나는 아이들 수업으로 얼른 화제를 돌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옆에서 흠흠 헛기침을 하셨고 아이들은 괜히 못 들은 척 했던 것 같습니다. 글자도 아직 잘 못 쓰는 마냥 해맑은 아이들이었는데, 그리움으로 나이들어 버린 마음 한 구석이 있었을 것입니다.


둘이 나란히 앉아 무언가를 하겠다고 열심인 모습을 보면 제 눈에도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항상 둘이여서 다행이다, 생각했습니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 같이여서. 엄마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크고 있는 형제지만 잠들기 전, 엄마가 보고 싶어질 때도 얼굴 부비며 숨소리 들으며...잊어버리고 장난칠 수  있는 형제가 있어 다행이다, 자다 깨서 무서울 때도 나랑 똑같이  형의, 동생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다. 학교에서 집까지 어른에게도 버거운 오르막길이지만 같이 손잡고 오를 수 있 너무 다행이다...나는 생면부지의  남인 형제의 어머니에게, 비록 할머니에게는  "자식 새끼들  떼놓고 간 인정머리 없는 년"이지, 가끔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함께 낳아준 것이요.


그런 생각을 하면 옆에서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시는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썩을년!욕으로 시작했다가, 에휴 오늘은 뭐 해 먹나? 하며 씩씩하게 털어낼 수 있는 것은 할머니 곁을 지켜주며 황혼으로 함께 물들어가는 할아버지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그 특유의 씩씩함으로 이 네 식구의 공간을 슬픔에 잠기지 않게 하셨습니다


준이 옆의 웅이가, 할머니 옆의 할아버지가...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갑절의 안정과 충만함을 가져다주는지! 나도 함께 늙어갈 동반자가 꼭 어야겠다...모두 내 손을  떠난 뒤  찾아 온 고요함과 적막함을 함께 살아 온 추억들로 채울 수 있는, 두런두런 자식들 걱정하고 흉볼 수 있는, 내 신랑이 있어야겠다. 그리고  결혼하면...하나가 아니라 꼭 둘은 낳아야 겠다,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도 그 시절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형제 곁에 엄마가 함께 있었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할머니의 장독에서 오래 묵혀 끓인 된장찌개가, 할머니의 상추가, 딸을 위한 밥상에 올라갈 수 있었으면 하고 상상해 봅니다. 당연히 지금은 그 모두가 나이들어버렸을 텐데도, 내 상상 속의 준이 웅이는 항상 그 모습일 것만 같습니다. 아직도 씩씩하고 정정하신 할머니와 다정한 할아버지 그 모습 그대로, 너무 늦지 않은 때에 형제 옆에 엄마가 있는 그림을 그려봅니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수업하는 동안 부엌에서 끓고 있던 할머니의 된장찌개 냄새도 나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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