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어난 지 오십 일 남짓, 한 줌밖에 안되던 그 밀가루 같이 하얀 아기. 그 아기를 안고, 나는 서울대학 병원의 응급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옆 병상에는 스무 살은 되어 보이는 턱이 거뭇한 청년이 아기의 표정을 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호스를 꽂고 있는 입에서는 힘 없이 거품이 흘렀습니다. 청년의 어머니도, 그리고 그 청년도 그 청년을 대하는 의사들도 이 상황이 익숙한 듯 보였습니다.
응급실은 만원이었지만 소리내어 울 수 있는 건 우리 아이, 시우뿐이었습니다.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의와 레지던트들이 쉴새 없이 호출을 받고 드나들었습니다. 열 때문에 팔과 다리가 축 처진 아기를 안고, 위안인지 불안일지 모르는 멍한 감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40도를 웃돌던 열이 결국 잡히지 않자, 동네 소아과에서는 큰 병원에서 검사 받기를 권했습니다. 첫째가 신생아일 때부터 우리 아이들을 봐주셨던 의사 선생님. 불안해하는 부모들 앞에서도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인 의사 선생님이셨는데, 시우의 상태를 보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큰 병원에 가 봐야 겠어요, 백일 이전에 이렇게 열이 계속 나는 건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합니다…."
우리 부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병원으로 가자, 결정했습니다.
병원이 익숙하지 않은 시우는 몸도 아프고 병원 자리가 익숙치 않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백일 이전에 아기는 집에서도 엄마를 잠 못 이루게 하지요. 열 때문에 되도록이면 안아주지 말라고 했지만, 자지러지는 시우를 안아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낮 동안 링거 바늘을 꽂았다 뺏다 하느라, 제 무게에는 버거운 양의 피를 뽑느라 지칠 대로 지친 아기였습니다.
시우를 안고 병원 복도를 밤새 걸었습니다. 나중에 다른 대학 병원들을 드나들며 비교하게 된 것이지만, 서울 대학 병원 소아과 병동은 밤에도 불이 거의 꺼지지 않습니다. 코드 블루1)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 의사들이 어딘가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 가는 상황이 하룻밤 사이에도 여러 번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런 소란함 속에 잠이 들지 못하는 아기를 안고 밤새 복도를 서성이는 엄마들이 나 말고도 많습니다. 눈 밑에 지친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채, 헝클어진 머리로, 여자보다는 오직 엄마로 이 순간 내 품에 안긴 아기만을 향한 그들의 표정을 보며 서로 말 없는 위로를 받습니다.
시우는 첫 날은 정말 밤새 울었습니다. 아기가 괴롭다고 큰 소리로 울어제껴도 그 곳, 서울 대학 병원간호사들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말 한마디 건네주지 않습니다. 그 순간은 그게 참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아기가 많이 아픈가 봐요."라고 해주면 "우리 아기가 여기가 낯설어서 이렇게 우나 봐요. 너무 시끄럽지요, 미안합니다." 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래서 그 민망하고 미안한 시간을 견디고 싶었지만, 그 말 할 '자리'를 쉽사리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마음 속으로만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키며
우는 아기에게 '아프게 해서 미안해, 미안해……'를 되뇌이며 그 새벽, 계속 복도를 돌고 돌았습니다.
나를 위로해 준 건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던 근육병 환아, 건희2)의 어머니였습니다. 다섯 살 딸, 그리고 이제 돌이 갓 지난 아들을 데리고 병원 살이를 하고 있던 곱디 고왔던 엄마. 건희 엄마는 참 젊고 예뻤습니다. 이제 갓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도 안 된 내 행색에 비교하면 더더욱이요.
태어나자마자 근육병 진단을 받고 지역 대학 병원에서 서울 대학 병원으로 전원을 온 것이 지난 달이라고 했습니다. 건희는 돌이 지났지만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습니다. 건희의 몸에 주렁주렁 연결된 각종 검사 기구들만 삑삑 건조한 소리를 내며 건희가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 주었습니다. 병원 생활 2년, 그게 어떤 시간일 지 머리로 잘 가늠이 가지 않았습니다.
건희 엄마는 참 씩씩 했습니다. 건희의 누나, 그래봤자 이제 다섯 살이던 딸 은수는 병원을 제 집으로 알았습니다. 아들의 병상 옆에 간이 텐트를 치고 병상 밑 바닥에서 지냈습니다. 병원측의 배려로요. 병원이 집이 된 건희네의 병상에는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각종 소꿉놀이 장난감도, 간이 의자와 간이 공부상도 있었고, 손쉽게 탁 펼쳐지는 노트북 거치대도 있었지요.
하루 이틀이 지나고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은수에게 건네는 간호사들의 다정한 말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픈 아이들을 대하는 때로 무심한 태도가 무관심이 아니라, 그 곳에서의 시간들을 견디기 위한 그들만의 방어벽이었음을 그제서야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은수는 본인과 동생에게 꽂히는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한듯 했습니다. 동생에게 엄마를 뺏기고, 인형과 간호사들과, 이웃 병상의 가족들과 살갑게 지내는 법을 알았습니다. 다섯 살같지 않은 어른스러움이, 낯선 이에게도 스스럼없이 도움을 요청하고 받는 모습이 왠지 정말 마음 아팠었습니다.
병실에서 우리 시우같이 가벼운 병을 앓는 아이는 저희 아이뿐이었습니다. 모두 장기 입원 환자였어요. 그렇지만 병실은 결코 어둡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곳은 응급실이 아니었거든요. 오늘 하루 우리 아이는 살아 있었고 건강했고 엄마가 먹여 주는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병실 사람들은 아이의 검사 결과나 무거운 검사 일정 등 다소 어두운 이야기를 하다가도 금새 소소한 걱정거리들을 나누며 웃었습니다. 말 안 듣는 아이의 오늘은 그들에게는 행복이었습니다. 병원 밥이 지겨워 아기같이 투정하는 열두 살 딸을 업고, 안고 달래며 빡빡 깎은 머리에, 입에 뽀뽀를 퍼붓던 엄마. 아직 많이 업어주고 싶은데 허리가 아프다며, 내게 요즘 어떤 아기띠가 좋은지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곳이 처음인 저를 오히려 위로해주는 건 그들 이었습니다.
열이 잡히지 않고,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시우의 입원은 길어졌습니다. 회진 나온 의사가 생전 처음 들어 본 낯선 검사를 해야 한다고 얘기해 주고 총총 사라지고 나면 초조해하는 나에게 그 검사가 어떤 것인지, 걱정할 것 없다고 괜찮다고 설명해 주는 것도 건희 엄마, 그리고 열두 살 백혈병 환아의 엄마였습니다.
시우는 보름 정도가 지나 의사의 퇴원 허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레 쯤 검사 결과 보고 이제는 퇴원해도되겠어요." 그 순간 기쁜 마음 한 편 먹먹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요. 내가 왜 그때 옆 병상 식구들의 표정을 슬쩍 살폈을까요. 잠깐의 정적. 그것은 그저 부러움이었을 것입니다. 긴긴 시간을 이곳에서 아이와 견뎌야 하는 엄마들의 희망. 나에게도 저 시간이 올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함과 기대. 시우처럼 가벼운 입원을 하고 퇴원하는 사람들을 보낼때마다 느껴야 하는 부러움.
그 다음엔 우리 아이일 수 있을까.
"우리 이제는 보지 말자?"
퇴원하던 날 건희 엄마는 시우 건강하라고,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말라고 하면서 환하게 웃어 주었습니다. 나는 바보같이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웃었던 것 같습니다. 이별이 익숙한 은수를 보니 더욱 그랬습니다. 건희와 은수를 생각하니 지금도 눈물이 너무 납니다. 지금 다시 만나면 본인도 힘들었을텐데, 막막하던 나를 위로 해주어서 너무 고마웠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밤새 안 자던 시우를 안고 복도를 걷던 밤, 건희 엄마와 함께 했던 시간이 나에게는 다른 세상을 만난 전환점이었습니다. 건희는 누나의 작은 손을 잡고 다른 여느 아이처럼, 걸음마도 하고 말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2.
서울대 병원을 퇴원한 후에도 시우는 괜찮지 못했습니다. 한 계절이 지나기가 무섭게 병원을 드나 들었습니다.
시우는 2년을 넘게 기다려 낳은 아기였습니다.
시현이가 세 살 쯤 되어 이쁜 짓을 시작하고 둘째를 갖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임신 테스트기에서 번번이 한 줄을 보며 절망하던 시기가 내게도 있었습니다. 그때 아이가 너무 울어요, 아이가 밥을 안 먹어요. 아이가 심하게 떼를 써요, 평범하고 소소한 고민을 나누던 엄마들의 공간 다른 한 곳_기다리는 아이가 오지 않아 한 달 한 달을 마음 졸이며 기도하는 엄마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와주었던 아기에 기뻐한 것도 잠시, 임신 5주가 지나지 않아 심한 복통이 왔고 병원에서는 '복막염'인 것 같다며 더 큰 병원에서 검사받기를 권했습니다. 산모의 내과 수술을 진행해주는 큰 병원으로 찾아가던 그 때에는 임산부를 진료하고 수술하는 병원이니 내 아기는 괜찮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비전문가의 눈에도 허술해 보이는 복대를 두르고 엑스레이를 몇 번이나 찍는 동안, 차가운 바닥에 내 몸을 뉘이고 진료를 받는 동안 내 마음의 소리 없는 불안은 커져 갔습니다.
아기가 잘못될 것이라고 말하는 의사는 없었지만, 괜찮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의사도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의사들은 아마 알았을 지도요. 3개월도 지나지 않은, 겨우 작은 태아일뿐인 내 아기가 그 수술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는 걸.
빠르면 5주에도 심장소리를 들려주건만 내 아기는 심장소리를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입원해있는 동안도 산부인과로 내려가 몇번이나 초음파를 보았습니다. 늦어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불안해지는 나를 도닥였습니다. 8주 9주에 심장소리를 들었다는 글들을 수 없이 검색했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답을 찾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아기가 괜찮다면, 임신 9주였을 즈음. 간절한 마음으로 초음파를 보는 순간도 아무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습니다. 화면 속의 아기는 그저 망망히 떠 있었습니다. 의사가 침묵하던 그 1분 1초가 얼마나 길고 영원같았는지 모릅니다.
산부인과 의사는 처음부터 약했던 것이라고, 엄마의 수술 때문은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엄마 앞에서 잘 울지 않는데 비로소 사산 진단을 받은 그 날, 펑펑 울었습니다. 한 달을 넘게 괜찮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사실은 그저,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안해서 울었습니다.
가뜩이나 약하게 내 몸속에 자리 잡았을 아기가, 엄마의 수술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리고 너무 힘들어 하늘나라로 갔을 것 같아 그게 너무 미안해서 울었습니다. 하늘에서는 제발 편하게 있기를. 병원의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이나 수술 도구를 만나지 않고, 따뜻하고 폭신한 구름 이불 덮고 있기를 그렇게 상상하고 바랬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를 떠나 보내고 3개월만에 찾아온 아기가 우리 시우였습니다.
그래서일까, 내가 내 몸 회복도 돌아보지 않고 아기만을 바래서였을까.
시우가 또 병원을 입원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자책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세 돌을 지날 때까지도 그렇게 보냈습니다. 아이를 보며 웃음보다 눈물이 나던 시간이었습니다. 나가서 바람이 좀 차다 싶으면 바로 기침을 했고, 그 기침이 하루 지나지 않아 가래가 끓었습니다. 그러면 바로 열이 40 도까지 올랐습니다. 체온계를 보며 애태우고, 다시 또 절망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모두가 엄마인 내 잘못인 것 같았습니다. 아픈 아이에게도, 매번 할머니에게 맡겨지는 큰 아이에게도, 미안하고 또 미안했습니다.
2017, 2018년은 크리스마스도, 연말 행사도 병원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았습니다. 매일 세 시간도 못 자고 출근해야 했던 우리 부부도, 동생이 아플 때마다 할머니 집에 맡겨져 엄마 아빠 손길 못 받고 지내야 했던 우리 큰 아이도, 가족 모두 하나만 기도했습니다. 같이 둘러 앉아 저녁 먹고 같이 눈 뜰 수 있기를. 링거 줄 걱정하지 않고 시우를 맘껏 숨막히게 껴안을 수 있기를, 그 당연한 일상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모릅니다.
그 시절의 시우 사진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안 그래도 얼굴이 하얀데 더 핏기가 없습니다. 그래도 엄마 아빠를 향해 웃어주는 우리 아기.
첫 아이 낳고 일에 빠져 엄마 노릇 안하던 불량 엄마,
난 그때 엄마가 된 지도 모르겠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아기를 기다리고
그리고 하늘나라로 떠나 보내고,
그리고 아픈 아이를 키워내는 동안
평범해 보이는 나의 엄마로서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눈물나게 간절한 날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이가 퇴원하고 집에 온 날은
아무 풍경이라도 좋았습니다.
아이가 형과 게임에 빠진 것도 좋고
둘이 투닥거리는 것도 좋고
밥 투정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나란히 앉아 요구르트 홀짝대는 모습에 벅찼습니다.
그저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제발 더 이상 입원하지 않고 이대로만 지낼수 있다면
아이에게 화내지 않고 마음껏 안아주고 감사하며 그렇게 살리라,
그렇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 시절을 지난 후 저는 참 많이 변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나는 가끔 그저 이 아이들이 나에게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해서 눈물이 납니다. 육아서를 읽어도 눈물이 나고 소설책을 읽어도, 전문 서적을 읽어도 아이를 키우는 나를 향한 말로 들립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내 앞에 나에게 짜증내고 말 지독히 안 듣는 이 열 두살 아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말 안듣고 까불고 소리 지르는 이 아이들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나는 참 기적 속에 살고 있구나, 라고.
이 모든 순간이 기적이라고.
1) 코드 블루_병원 내 긴급 방송시 사용되는 용어로, 심폐소생술(CPR)이 필요한 환자가 생긴 경우.
2) 은수와 건희는 실제 이름이 아닌 가명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