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래. 한창 귀여운(?)나이의 딸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출근하는 아빠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 공간을 채운 정적. 그 끝에 엄마는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내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지금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 당시의 어린 '나'가 더 안타까운 것은 나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나 원망조차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빠라는 존재는 그런지 알았던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스스럼없고 밝았던 동생은 그런 무뚝뚝한 아빠에게도 입 바른 소리도 잘했고, 한 번씩은 대들기도 했고 미주알고주알 있었던 일들도 잘 이야기 했다. 쓸데없이 생각 많고 머리만 굵었던 나는 아빠가 어려웠고, 쉽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아빠와의 관계는 비단 아빠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 성격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유년의 나는, 그래서 내가 자전적 소설을 쓰며 내가 연구하고 싶은 연구 대상이다.) 아빠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이 어색해서 그런 시간을 자꾸 피하려 애썼다.
어떤 어른이 “아빠가 엄청 예뻐하겠네.”이야기를 하면 진짜 그런 척도 했고, 가끔은 아빠에게 사랑받는 공주 같은 딸을 연기하기도 했다. 이십대에는 이상한 연애관이 생겨 정상적이고 풋풋한 연애를 하기 보다는 나에게 미쳐 날뛰지 않으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섣불리 판단했다. 가끔 나의 ‘이상함’을 느낄 때마다 내 어두움의 근간은 아빠와의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작용하는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덧 아빠의 나이를 지나는 나는, 이제 안다.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아빠가 했던 최선의 사랑,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할머니는 집에 어린 아이들만 놔두고 화투판을 찾아다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할아버지와, 돌아가신 후에는 이웃들과 또 장성한 자식들과 꼭 싸워야만 살아 갈 수 있는 사람 같이 잦은 분노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다정한 말은커녕, 따뜻한 온기가 머무를 수 없었던 집. 그리고 그런 집에서 말썽 많은 동생들과 할머니까지 모든 식솔을 책임져야 했던 가장의 무게. 그 무게를 지고 내가 태어났을 때, 아빠는 집에서 침묵을 택했다. 할머니는 자주 아빠가 다니는 길목에 미리 앉아 있다가 아빠가 지나가면 아빠에 대한 원망과 악다구니를 쏟아내곤 했다. 그래도 아빠는 인내했다. 단 한 번도 대들지 않고. 그리고 그 침묵은 가족들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래도 그런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매일 밤 같은 이불을 덮고 잤던 엄마로써는,
지금 생각해보면 잊을만하면 끊임없이 자식들에게 아빠를 옹호해주었던 것이다.
ㅡ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래.
ㅡ 사랑받지 못해서 그래.
"아빠는 자식들 앞에서 절대 싸우지 않기로 결심했단다."
결혼하며 첫날 밤 했던 아빠의 이야기가
엄마에게는 어쩌면 평생의 ‘덜미’가 되어버렸다.
아빠의 자식들에 대한 무관심도
그리고 그 혹독한 전쟁터 속에
엄마를 홀로 내버려 둠도
결혼하며 첫날 밤 했던 그 결심, “우리는 자식들 앞에서는 싸우지 맙시다.” 그 말에
아빠 깊은 곳의 상처를 연민하고,
아빠 깊은 곳의 사랑을 믿고
엄마를 견디게 해 줄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이 사람과 살아내었을 때 그래도 우리 자식들은 잘 자랄 수 있을 거야,
견디는 주문이 되어버렸다.
기억이 난다.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면 곧 두 분이서 어딘가를 나가서한참을 있다 오곤 했다. 아이들 앞에서는 싸우지 않기 위해서.
할머니의 악다구니로 우리 집은 매일매일이 눈물이고 전쟁터였지만
그렇구나. 나는 엄마 아빠가 싸우는 건 본 적이 없구나.
가끔 소름처럼 떠오르는 깨달음인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부모가 되어
서로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미움도, 원망도, 서러움도 때로 생겨나는 것이
부부이고 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의 부모의 노력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것인지를 절절하게 느끼곤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싸움, 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고 분노의 감정에 잘 휘말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