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와 여름은 유독 지나온 이들의 기억 속에서 아름답게 회상되는 노스탤지어다. 우리는 여름의 싱그럽고 푸른 이미지를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한여름이 찾아오면 하루빨리 이 더위가 물러나 주기를 바란다.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격동의 시절’인 인간의 사춘기 역시 그렇다. 어른들은 입버릇처럼 사춘기 시절을 그리워하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사춘기란 그 시기의 외로움과 무기력감, 요동치는 감정의 아픔을 걷어낸 환상적 이미지일 뿐이다. 그렇다면 환상적 이미지를 걷어낸 여름과 사춘기는 어떻게 영화화 될 수 있을까? 윤단비 감독의 첫 장편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사춘기를 맞이한 옥주의 어느 여름 방학을 조명하며 상실 속에서 일어나는 한 소녀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1.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과의 만남
영화는 살고 있던 반지하 집을 정리하고 이사를 준비하는 가족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생활고로 인해 오랫동안 교류가 없었던 할아버지네 집으로 들어가게 된 남매는 인사 한마디 없는 과묵한 할아버지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할아버지와 함께 갖는 첫 식사 자리 역시 경직되고 어색하기만 하다. 나와 다른 세대, 다른 환경, 다른 가치관 속에서 살아온 대상과의 간극은 영원히 좁혀질 수 없을 것처럼 막연해 보인다. 카메라는 할아버지를 의도적으로 초점화하지 않고, 그로 인해 남매뿐만이 아닌 관객 역시 할아버지의 생각과 태도를 쉽게 짐작할 수 없다. 이렇듯 미지의 대상이 주는 긴장감은 미정이 동주에게 건넨 하나의 제안으로 허무할 만큼 쉽게 무너진다.
옥주에게 2층 출입을 금지당한 동주는 미정으로부터 할아버지와 대화하길 제안받는다. 동주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걱정하지만, 미정은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주는 시도 자체를 좋아할 것이라며 동주를 격려한다. 미정의 말에 용기를 얻은 동주가 정원에서 물을 주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손을 흔든다. 첫 만남에서 느껴지던 무게감이 무색하게도 손주의 부름을 들은 할아버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동주에게 손을 마주 흔들어준다. 할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오던 순간부터 남매와 공유하던 관객의 긴장이 해소되는 순간이자 낯선 대상에 대한 오해가 사라지는 장면이다. 가장 멀게만 느껴지던 타인은 용기 내어 건넨 단 한 번의 손짓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타인이라 하여 그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까? 옥주와 아빠는 같은 집에서 매일 함께 식사를 하는 가족이지만 영화 내내 반복되는 대화의 패턴으로도 짐작하듯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다. 대화가 완전히 부재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간간히 이루어지는 대화 속에서 두 사람 모두 서로가 갖고 있는 내면의 깊숙한 이야기를 꺼내 놓지 못한다. 옥주는 아빠에게 엄마와의 만남을 상의할 수 없고, 아빠는 아직 어린 옥주에게 어려운 집안 사정을 의논할 수 없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조심성은 어느새 부녀를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로 만들어 버렸다. 가장 가까운 보호자와 마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며 자란 옥주는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해 주는 일에 훈련되어 있지 않은 청소년으로 자랐다. 개중 옥주가 가장 완강한 태도로 외면하는 마음은 ‘그리움’이다. 나란히 누운 미정에게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슬며시 꺼내 보기도 하지만 옥주는 끝끝내 자신을 떠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집안엔 옥주처럼 조용히 그리움을 삼켜내는 또 한 명의 존재가 있다.
모두가 잠든 밤 옥주는 거실로부터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따라 1층으로 향한다. 거실에선 소파에 앉은 할아버지가 오래된 스피커로 신중현의 미련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옥주는 할아버지의 감상을 방해하는 대신 계단에 앉아 할아버지와 같은 음악을 들으며 생각에 잠긴다. 동주가 할아버지에게 손을 흔드는 방식으로 심리적 거리를 좁혔다면, 옥주는 같은 시간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경험을 통해 마음의 문을 연다. 그간 옥주에게 가장 필요했던 경험은 이렇듯 가까운 이와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작은 소통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2. 아빠, 신발 짝퉁이었어?
다른 친구들처럼 용돈을 받으며 생활하지 못하는 옥주는 아빠의 신발을 훔쳐 남자 친구에게 선물하고, 쌍꺼풀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한 중고 거래를 한다. 거래자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게 된 옥주는 그 과정에서 아빠가 판매 해오던 신발이 진품이 아닌 가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짝퉁 판매를 해오고 있었냐는 옥주의 물음에 아빠는 ‘어차피 모두 같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이라며 변명하고, 옥주는 이와 같은 아빠의 생각을 부끄러워한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아빠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좁은 차 안에서 옥주는 끝끝내 아빠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다. 옥주는 왜 그렇게까지 아빠의 짝퉁 신발에 수치심을 느낀 것일까?
다른 가족들의 출입이 제한된 2층 공간에서 옥주의 방은 밖에서부터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자주 비추어진다. 이때 옥주가 사용하는 데스크 위에 놓인 손거울은 옥주의 마음을 비추어주는 오브제로, 처음 그것은 빛에 반사되어 또 하나의 작은 창문처럼 보인다. 창 안의 또 다른 창은 옥주가 손으로 집어 들자 평범한 거울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옥주는 이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거울로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보던 옥주는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숨을 내쉰 뒤 아빠에게 쌍꺼풀 수술비를 빌리러 내려간다.
옥주는 자신이 소망하는 것들의 원본을 갖지 못한 아이다. 정착할 집을 갖지 못한 채 할아버지의 집에 얹혀사는 세 사람의 상황부터 그러하다. 아빠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지 못해 여러 지역과 직업을 전전하며 살아가고, 엄마는 남매에게 물질적인 선물로만 소통한다. 거울 속엔 연예인처럼 쌍꺼풀이 있는 큰 눈 대신 무쌍꺼풀의 작은 눈이 보이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상대를 원하지만 남자 친구는 단 한 번도 옥주에게 먼저 만나자는 연락을 보내주지 않는다. 어느 것 하나도 옥주가 원하는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옥주를 둘러싼 이상향의 모조품들은 옥주를 불안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원본에 대한 옥주의 욕망은 마음껏 표현되지 못하며 언제나 외로이 억제되고 외면받는다. 아빠와 의견이 충돌할 때마다 옥주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논리적인 방식으로 모두 쏟아내지 못한 채 갈무리되지 못한 감정의 전달을 포기해 버린다. 사춘기란 외부의 부조리한 상황을 인지함과 동시에 뜻대로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이해하기 시작할 나이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배우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어 의사 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타자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들에 불안함과 외로움이 나날이 고조된다. 울고, 떼쓰고, 소리치기에 옥주는 가족이 처한 위태로움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마음속에서 불쑥 고개를 내미는 감정들은 현실의 벽 앞에서 자꾸만 후순위로 밀려난다.
가족 내에서 옥주 만큼 의사 표현을 강하게 억제 받고 있는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옥주와 가장 나이가 많이 차이 나는 노년기의 할아버지다. 집안의 가장 역할에서 내려와 직업 생활을 은퇴하고 점점 돌봄이 필요한 몸으로 변해가는 노년기는 사춘기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 의사 결정권을 갖기 어려운 시기다. 할아버지는 자신 명의의 집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편한 거동으로 인해 다른 가족 구성원들처럼 집안 곳곳을 자유롭게 누비지 못한다. 그는 밤늦게 다투는 딸과 사위의 일에도, 집의 존속과 매매를 결정짓는 의논에도, 심지어는 자신의 거처를 결정짓는 일에서도 소외된다.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의 요양원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 아빠는 정원에서 포도를 따 불 꺼진 안방에 접시를 놓은 후 방문을 닫는다. 이때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안방의 조도와 환한 조명 아래에서 요양원 이야기를 나누는 2층의 조도가 대비되며 할아버지의 소외됨이 더욱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방 안에서 홀로 포도를 먹던 할아버지는 과연 자식들에게서 집의 매매와 요양원 이야기가 오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할아버지는 옥주처럼 모든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저 발화할 수 없는 상태였을 지도 모른다. 옥주가 이상적 원본을 욕망하기에 너무 어린 것처럼, 그는 너무 늙어버렸다.
3. 그리움이 머물다 갈 수 있게 모기장을 살며시 열어 두자
미성년인 두 아이와 불안정한 고용 환경의 아버지가 살아가는 가정에서 옥주는 가족들에게 부재하는 어머니의 역할 대리를 기대 받는다. 어머니이자 딸이 되어야 하는 상황은 아직 어린 옥주에게 혼란스럽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현실적 난관에 부딪히거나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함이 쌓여갈 때마다 옥주의 원망은 자연스레 자신에게 역할을 넘겨주고 떠난 엄마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부모의 무책임함에 대한 분노와 떠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으면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엄마가 가장 화목했던 시절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길 바랄 수도 있다. 옥주는 후자의 마음을 부정한다. 옥주에게 그리움을 표현한다는 것은 불쌍해지는 일이고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다.
반면 동주는 옥주와 달리 엄마와의 교류를 망설이지 않으며, 엄마를 거부하는 옥주에게 엄마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발화한다. 동주가 엄마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옥주는 해맑은 동주의 태도에 분노하고, “너는 자존심이 없냐”며 비난한다. 그러나 영화를 면밀히 보다 보면 동주는 옥주의 말처럼 철이 없거나 자존심이 없는 인물이라기보단 옥주처럼 가족 내에서 자신이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해 지나칠 만큼 눈치를 보고 있는 아이로 보인다. 동주는 가족의 분위기가 가라앉거나 대화 주제가 사라질 때마다 나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춘다. 춤을 감상한 뒤 휴대폰을 사주겠다는 아빠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음에도 이를 따져 묻거나 되새기지 않는다. 2층 중문을 닫아버린 누나 대신 1층을 쏘다니며 가족들에게 말을 걸고, 전달할 소식이 생길 때마다 자신을 거부하는 누나에게 문을 두드린다. 엄마와 전화를 주고 받으며 엄마가 주는 선물을 덥석 받아오지만 정작 엄마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조르거나 재혼을 요구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옥주가 장녀로서 부재하는 어머니의 책임을 맡은 것처럼 동주도 가족의 와해를 막기 위한 일종의 접착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떼쓸 수 없는 여러 마음들을 흘려 보내고 있다. 동주가 자신의 마음을 돌볼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은 엄마가 그리워질 때 그립다고 표현하는 것뿐이다.
옥주는 할아버지 집의 2층을 자신의 구역으로 지정한 뒤 미정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2층에 침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작은 모기장을 치고 그 안에 들어가 잠드는 옥주의 모습은 마치 보호막으로 스스로를 감싸고 있는 형태처럼 보인다. 구역의 경계를 분명히 하려는 옥주의 모습은 동주에게 가장 심화된다. 억제와 인내의 역할자인 옥주에게 자신과 정반대의 역할인 동주를 구역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외면해 오던 내면의 마음을 마주하는 일과 같다. 그것은 국수를 먹는 일처럼 쉽고 자연스럽지 않다. 동주를 볼 때마다 자꾸 고개를 내미는 표현의 욕구는 얹힌 밥 마냥 옥주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식사를 하거나 정원 식물에 물을 줄 때를 제외하면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던 할아버지가 옥주의 구역인 2층에 등장하는 장면은 이러한 맥락에서 상징적이다. 동주를 밀치고 울려버린 옥주는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의 등장에 당황하여 굳어버린다. 표현이 서툰 옥주에 비해 동주와 교류하는 시간이 길었던 할아버지의 입에선 당장이라도 옥주를 향한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옥주를 혼내는 대신 옥주와 다정히 눈을 맞추며 옥주를 방으로 들여보낸다. 화가 풀리지 않은 옥주가 문을 큰 소리로 닫고 들어가도 억지로 옥주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대신 바닥에 주저 앉아 울던 동주에게 엄마의 선물을 다시 쥐여준 뒤 일층으로 내려간다. 의도치 않게 감정의 폭발을 들킨 옥주는 남매를 대하는 할아버지의 태도를 통해 감정을 솔직하게 쏟아내더라도 불쌍해 지지 않고, 책임감 없는 아이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경험을 한다. 깊은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날은 옥주에게 있어 가족에게 부정적 감정을 인정 받은 흔치 않은 경험이 되었다.
이후 할아버지의 건강이 위독해짐에 따라 어른들이 부재하게 된 집에서 옥주는 베개를 들고 찾아온 동주를 자신의 구역인 2층의 모기장 안으로 받아들여준다. 미정과 함께 잠에 들 때 미정의 불면으로 인해 여러 번 잠에서 깨야 했던 모습관 달리 남매는 뒤척임 한번 없이 아침을 맞는다. 평화로운 아침잠을 깨우는 전화기 너머에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린다.
손님 하나 없이 썰렁한 빈소에서 애써 눈물을 참던 옥주는 내실에 누워 아주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한번도 꿈속으로 찾아온 적 없던 엄마가 나오는 꿈이다. 해당 씬은 옥주가 잠에 드는 쇼트 대신 바로 엄마의 입장 숏부터 시작되므로, 식사장면에서 나타나는 비현실적인 연출 전까지 관객은 그것이 옥주의 꿈임을 눈치채지 못한다. 옥주의 꿈은 평범하고 평화롭다. 가족들은 서로 얼굴을 붉히거나 눈물을 흘리는 대신 밝은 표정으로 모여 앉아 식사를 한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진 않지만 꿈속의 식사 장면은 옥주가 바라오던 원본에 가까운 가족의 모습이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꿈’은 내면의 그리움이 표현되고 해소되는 공간이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집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아버지와의 기억을 꿈으로 떠올린다. 반복되는 실패와 단절 되어있던 시간들로 인해 어색해진 현재의 관계와 달리 유년기의 아버지는 자고 있던 아들에게 뜬금없는 장난을 치고 모른 체를 할 정도로 친근한 모습이었다. 꿈속에서 그리운 유년기의 추억을 만난 아빠는 거실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동주에게 오래 전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장난을 친다. 고모인 미정의 꿈 역시 마찬가지다. 꿈에 할머니가 나온 적이 있냐는 옥주의 물음에 미정은 종종 꿈에서 갓난아이인 자신을 업고 가는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고 대답한다. 업혀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에서 미정의 꿈은 과거의 재현이 아닌 비현실적인 상상이다. 꿈이 현실을 얼마나 잘 재현하는 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리운 순간을 나만의 방식으로 소환해내고, 현실에선 해소할 수 없는 재회의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다. 표출되지 못한 그리움이 독소처럼 쌓여 나의 삶을 괴롭히지 않도록 꿈을 꾸고, 또 꾸며 스스로를 달래는 것이다.
장례식이 끝난 후 할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밥을 먹던 옥주는 식사를 중단하고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낸다. 늘 울듯 말 듯한 표정으로 도망쳤던 옥주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우는 장면이지만 2층의 방문과 모기장은 닫혀 있지 않다. 옥주는 할아버지와 이별한 슬픔을 가족에게 숨기지 않는다. 닫히지 않은 옥주의 문은 시간이 흐른 어느 여름 날의 장면과 이어진다.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옥주의 장면 속엔 모기장과 마찬가지로 옥주의 마음을 상징하는 2층 창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이어지는 쇼트에선 할아버지가 늘 앉아 있던 정원의 빈 의자가 오랫동안 비추어진다. 영화는 가족을 둘러싼 여러 현실적 문제의 해결을 보여주는 대신 할아버지와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내면의 감정을 조금 더 잘 인정해주게 된 사춘기 소녀의 작은 성장을 결말로 택한다. 한낮의 여름, 옥주의 꿈엔 어떤 그리움이 머물다 가고 있을까.
Editor: 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