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손

대책없는 사람의 대책

by 정민

순전히 내 잘못이었기에 동정받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남들처럼 살고 싶었을 뿐인데, '남들'의 수준이 그렇게 높은 줄도 몰랐고, 올라갈수록 끝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일찍이 포기했던 것 같다. 그다지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남들과 같은 삶을 바랐는지 모르겠다. 주제에 맞지 않는 치장도 필요했고, 친구들처럼 학원에 다니면 비슷한 수준의 대학은 갈 수 있을 거란 착각을 품었다. 꿈은 없었지만, 남들이 아는 회사 정도는 가보고 싶었다. 평범하게 살려고 했는데, 이렇게 평범한 게 어려운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남들처럼 살아라'라는 말에서 '남'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순간 그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다. 안정적인 회사에 성실하게 다니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아보라는 부모님의 무언의 압박을 나는 순진하게 받아들였다. 다행히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내 위치를 알게 됐고, 평범한 중소기업에 들어갔다가 남들이 대기업 가는 것을 보고 나도 대기업에 가고 싶어 사표를 냈다. 모은 돈으로 2년간 백수 생활을 하며 편입시험을 봤고, 서울의 어느 대학에 들어갔다. 졸업할 때가 되니 스물아홉, 나는 또다시 중소기업에 들어가게 됐다.

"남들만큼만 살자"는 나의 인생관 덕분에, 지금 다니는 회사는 동료들과 서로 의지하며 지냈고, 나름대로 열심히 회사 생활을 했고 생각한다. 지금의 아내는 내가 돈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20대 내내 쉬지 않고 일했으며, 지금도 계속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서 몇천만 원은 모았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돈이 없었다.

장남이라는 책임감으로 부모님의 노후를 지켜드리고 싶었기에 도움을 받지 않으려 했고(결국에는 받게 되었지만), 강박적인 자존심 때문에 대학을 두 번이나 다녔다. 학자금 대출을 갚으려 애썼지만 중소기업 연봉으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남들'처럼 살려다 보니 회식비도 내야 했고 그나마 다행인 건 분수에 맞지 않는 차는 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저축도 했었는데, 이 모든 말들이 왜 핑계가 되는지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장화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친한 회사 동생이 월급 생활로는 힘들지 않겠냐며 조언을 했다. 그때 동생의 말에는 무언가 의미심장한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장화리—나는 이 이상한 이름을 절대 잊을 수 없다. 중국원양자원이라는 상장사의 대표였는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 사람이 나를 빈털터리로 만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를 미워한다기보다는, 한순간에 이토록 비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아주 고마운 사람이라고나 할까.

이 주식을 사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믿을 수 없어서 50만 원어치만 샀다.

그리고 다음 날 상한가가 됐다. 겨우 그것밖에 사지 않았냐는 동생의 말에 용기를 얻어 전재산을 넣었다.

그리고 또다시 상한가가 됐다.

이유는 모르겠다. 회사 동생과 나는 며칠만 더 있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도 집을 살 수 있다는 기대를 이때 처음 해봤던 것 같다.

수개월 후 내가 투자한 회사는 대표의 거짓말과 몇 번의 사고로 거래정지 후 상장 폐지가 되었다. 회사 동생은 나에게 아직 정리하지 못했냐며 안타까운 말을 남기고 회사를 떠났다.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지만 미워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질 만한, 사회생활 중 가장 큰 첫 번째 시련을 맞았다.

결혼할 아내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네 남자친구가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을 결코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말하지 않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사기라도 칠 것도 아니고, 헤어지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상태였다. 결국 아내에게 모든 것을 이실 직고 하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집도 구하지 않고 결혼 준비를 한다는 것은 너무 무모했다. 월세라도 구하지 그랬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나는 어떻게 해서든 월세는 피해야겠다고 했다. 그나마 머릿속에 돈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겠다는 간절함은 있었나 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아예 나아가는 법을 몰랐다. 결혼은 했다. 대책 없는 놈이었다.

내가 야근을 더 많이 해서 전세금 마련하고 돈이 좀 남으면, 한 달에 한 번은 꼭 외식하자고 했다. 그런데 야근해서 돈을 벌어도 집에 오면 먹을 시간이 없고, 막상 시키면 너무 졸리고 피곤했다. 차라리 야근을 안 하고 돈이 없더라도 시간이 조금은 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배부른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결국 열심히 야근을 했다는 뜻이다.

피땀 흘려 번 돈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죄책감과 무너진 자존감, 그리고 삶에 대한 자신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사업을 하고 있었더라면 돈이란 있다가도 없는 것이라 위안을 삼았겠지만, 고작 월급쟁이 회사원인 나는 사실 능력이라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혼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본 글이 생각났다. 결혼을 안 하면 인생의 행복지수가 0~50이고, 결혼을 하면 -100~+100이며, 자녀가 태어나면 -500~+500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나는 태생이 변동성을 즐기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때마침 아이가 생겼고, 나는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었다.

이때 가장 큰 패배감은, 고등교육을 받고 대학도 나왔음에도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진 가치가 너무나 낮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노동의 대가로 받는 품삯은 정말 아끼며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이었다. 가끔 있는 특별한 기회에서도 나 같은 모지리는 꾸준히 돈을 잃기만 했다. 결국 돌이켜보니 이 일은 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능력 없는 나는 더욱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날 때마다 이력서를 여기저기 올렸다. 오직 급여만 더 주면 된다는 생각으로 매일 메일함을 확인했고, 몇 군데에서 면접 제안이 왔으며, 그중 한두 곳에서 나를 뽑고 싶어 했다.

“그래서 ,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네, 아무래도.. 급여가 너무 작습니다.. 뭐 다른 일이라도 해야 될까 봐요.”

“너는, 그래 솔직히 이야기해 보자, 너 지금 나이, 경력, 지금 여기까지 와서, 뭐 하나 아직은 안정되지가 않았어, 자리라도 좀 잡고, 준비를 해보거나, 아니면 뭔가 꿈이 있어서 나간다면 몰라도, 돈이야? “

“저.. 한번 망했었잖아요. 어떻게 해도 메꿔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제 나이도 곧 40인데..”

“뭐 더 말해서 뭐 해, 거기서는 얼마 준다는데? 뭐 한 3천 더준대?”

“아니요 천정도.?”

“그건, 너의 이직 값이야. 솔직히 여기 사람들이 힘들어서 나가는 것도 아니면, 거기는 여기 이런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일도 다르고 적응 못하면 또 떠돌이라고.”

“돈이..”

“그놈의 돈, 뭔지는 알지. 그런데 네가 뭘 얻고 잃고를 생각하면 그 돈이 생각보다 큰돈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지, 됐고, 뭐가 널 망하게 했다고? 문제가 뭔지 일단은 알겠으니까, 한 달만 보류해 봐. 대신에 내가 너한테 이게 적성에 맞는지는 모르겠으니까, 몇 가지 일을 좀 같이 해보자. 내가 니 올려줄 연봉만큼은 못 벌지도 몰라도, 젓가락 잡는 법은 한번 보게.”

“젓가락 잡는 법이요.?”

“너 꿈이 제수씨랑 야근 안 해도 한 달에 한두 번씩 외식도 하고 그러는 거라며, 적어도 그 정도는 잡아준다고 내가”

부진이 형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일을 잘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내가 이 사람을 만난 것은 인생의 행운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니 내가 내 삶에서 가장 강력한 임팩트를 준 사람이다. 이 사람을 보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잡아주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나와 나이차이도 2살밖에 나지 않지만, 이미 모든 것들이 안정적으로 일이면 일 가족이라면 가족, 모든 것이 탄탄대로인 형이었다.

그 기반에는 일단 회사에서 일을 참 잘하는 형이었다.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어려운 일이 와도 이 사람을 스치고 지나가면, 참 슬기롭게 헤쳐지고, 회사에서의 이 사람에 대한 리스펙도 좋지만, 이 사람은 인간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이었기에, 난 부진이 형의 우산이 개인적으로 좋았다.

어쩌면 그 부진이 형의 리더십보다 그냥 부진이 형이 나랑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는 좋았을지도 모른다.

일도 잘하고 나도 잘 챙겨주는 그 형이 나는 늘 고마웠었다.

솔직히 나는 그 형이, 나에게 잘해주는 것에 대해서 똑바로 물어본 적은 없었다. 이렇게 까지 잘해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의 진심을 들어주었고, 남들이었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이야기들을 항상 진심을 다해서 나를 도와줬었다. 그런데 그 형이 이제는 내 돈을 지켜주고싶 다고 한 것이다.

솔직히… 내가 얼마나 머저리 같은지 다 안다. 연봉 천만 원 더 주는 회사를 이직해야지 지금 자기 상사가 꼬신다고 그걸 마다하고, 상사한테 재테크를 배운다는 게 아주 웃기는 상황이 아닌가.? 이 선택을 받아들인 나도 웃기고, 그 선택을 권한 형도 웃기고.

지금 아주 웃기는 상황이 된 것이다. 또 속아? 그런데 이번에 상대는 내가 제일 존경하고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배울 점이 많은 부진이 형이었다.

나도 진심으로 뭔가 있다면 배워보고 싶었고, 그 형도 뭔가 내 안타까움이, 전달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겠지 싶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선택을 후회한들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어차피 낭떠러지 같은 길이었다. 나는 내 인생의 전부를 이상한 비포장 도로가 섞여 있는 골짜기를 넘어왔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점에서는 고속도로에 올라와도 늘 불안해서 다시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일을 반복하기도 했다.

커피는 쓴데, 그 쓴맛을 계속 맛보다 보면 맛의 차이가 보이듯이, 무엇이든 체감의 강도를 수치로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가장 큰 이유는 최소한의 투입 시간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을 항상 머릿속에 염두에 두려 했기 때문이다.

꼴에 가성비는 따지는데, 내가 가성비를 따지려면 이렇게 쏟는 시간 자체에 인생의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를 봐야 했다. 뭔가를 검토한다는 것은 내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인생 자체가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마치 파도에 올려놓은 돛단배처럼 눈비와 파도를 다 맞아가며 '도대체 뭐냐, 인생은 뭐냐' 하고 울부짖다가 잔잔한 아침을 맞이하는 일들의 반복이었다. 도대체 이게 맞는 걸까?

이제 와서 부정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그때의 나는 그게 최선이었다. 뱃속의 아이는 자라고 있었고, 나는 집을 나와야 했다. 서울의 아파트는 비쌌고 서울로 이직하면 삶이 고단했을 테니,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 형은 나에게 지금부터 달라지라고 말했다. 부진이 형은 나에게 악마의 열매가 아닌, 그냥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하면 좋을 것을 추천해 주는 느낌이었다. 분명히 지난번과 다른 건 그거였다. 그 형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 하나를 내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호의를 내가 무시하는 것이 이상하니까.

"그래서, 네가 가진 돈이 얼마인데?"

"이번에 월급 나오면... 200만 원 정도요?"

"그게 네 재산이라는 걸 알겠지?"

"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달에 10%씩만 벌자. 어때?"

"그럼요. 저는 그 돈이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수년간의 도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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