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산책: 수필
새끼손가락의 약속
나에게는 딸이 둘 있다.
처음 아이를 키울 때, 직장 생활이든
개인 사업이든, 사람들은 ‘아들 하나
없는 딸딸이 아버지’라며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말에 흔들린
적이 없다. 내게 딸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아들이 부럽지 않았다
아니, 딸이어서 더 좋았다.
딸을 키우며 나는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이성에 대한 문제만큼은 가정에서,
아버지로서 내가 1차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조심스레, 그러나 철저하게
성교육을 시켰다.
언젠가 누군가의 아내가 될 아이들
이기에, 몸보다 마음이 먼저 성장하길
바랐다 세월이 흘렀다. 큰딸도, 작은딸
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까지 잘 다녔다. 성적도 좋았고, 말썽
한 번 부리지 않았다.
사춘기에도 큰 반항 없이 우리 부부를
잘 따라주었다. “딸들을 잘 키우셨네요.”
그 말 들을 때마다 어깨가 으쓱했고,
어느 가문의 며느리가 될지 몰라도
넝쿨째 굴러온 복덩이라는 말까지
들을 땐 내심 자부심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딸들이 더없이 자랑스러웠고,
그만큼 더욱 철저히 가정교육에 마음을
쏟았다. 특히 이성문제에 대해서는…
그런데 어느 날, 잊히지 않는 장면 하나
가 생겼다. 늦은 오후, 시내 전철 안.
복잡한 사람들 사이로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 여자 쪽 얼굴이 낯익다 싶었는데,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아이는
내 큰딸이었다. 그 곁의 청년은 키가
크고 단정해 보였지만, 두 사람은 어깨
를 맞대고 있었고, 분명 애정 어린 눈빛
이 오가고 있었다.
그 순간, 배신감과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왔다.‘저게 뭐야… 딸이 저럴 수가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지’
만나는 애써 못 본 척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나는 딸을 대하는
마음에 미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아빠~” 하며 목에 매달리는
딸의 모습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곱게 키운 아이가, 왜…’
딸을 믿었던 만큼 실망도 컸다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
에서는 무언의 질문들이 떠돌았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집 앞 골목에서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았다.
익숙한 실루엣에 다가가려는 찰나,
“아빠!”
뒤돌아보니, 또 그때 그 청년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안에서 뭔가가 "툭"하고 부러졌다.
사랑하는 딸을 향한"믿음의 끈"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혼자만의 싸움을
시작했다. 결혼 전엔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겠노라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던
딸인데... 그 약속이 너무 허망하게
느껴졌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순결한
상태로 시집보내고 싶었던 건 오롯이
아버지로서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욕심이었을까.
딸들은 결국 내가 본 청년이 아닌
다른 사람과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모두 50대를
앞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제 가정에서
제 삶을 성실히 살아내고 있다.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리면 서운함보다
더 큰 감정이 찾아온다. 미안함이다.
그저 한 사람의 여인으로 성장해 가는
딸을 너무 아버지의 눈으로만 보았던
건 아닐까.
지금도 나는, 아무도 모르게
그 옛날 "새끼손가락 걸며"
순수하게 웃던 그 미소를 기억하며
마음속으로 딸들의 평안과 행복을
빌고 있다
끝내 말하지 못한 아버지의 기도가
이제는 작은 바람결로라도 그 아이들
의 삶을 감싸주길 바란다
그래, 너도 이제 너만의 길을 가야겠지.
그 길 위에서 울고 웃으며 너답게 살아
가기를. 나는 다만, 멀리서 조용히
아버지의 마음으로 너를 응원할 뿐이다.
그리고 바란다.
세상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와도
네 마음 한편엔 늘
아버지와의 그 약속이 살아 숨 쉬기를
그 약속처럼 단단하고 바르게
지금처럼 자신을 사랑하며
작은 가정 속에서도 당당히
"너의 길을 지켜나가기를".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그 손가락 하나로 마음을 걸던
그 순수함만은 잃지 않기를. 세상이
아버지는 지금도, 그 자리에서
너의 삶을
조용히, 그리고 오늘도
변함없이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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