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찌값 청구서

마음의 산책: 수필

by 하태수 시 수필

찌찌값 청구서


그해 봄, 날씨도 좋고 보리도 쑥쑥 올라

오던 철이었습니다. 마누라가 밭에 다녀

온다고 시내 장에 따라나섰다가,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자꾸만 멀어지는 겁니다

.

“야, 늙은 것아, 왜 이렇게 늦게 따라오니?”

하니까, 마누라가 숨을 몰아쉬면서 한 마디

하대요. “속이 답답하고 숨이 차서 빨리 못

걷겠어요…”


얼굴을 빤히 쳐다봤더니, 글쎄, 색이 누렇

다 못해 꼭 병아리 간장 찍어놓은 것처럼

노란 거 있죠. 농사꾼 눈에는 풀떼기든

사람 얼굴이든, 이상하면 바로 티가 납니다


‘이거 속이 단단히 상했구나’ 싶어서 시내

병원으로 데리고 갔지요. 젊은 내과 과장이

라는 양반이 뭐 라카냐면,“역류성 식도염

이니 약 한 달치 먹이면 됩니다” 하더이다

.

그래서 약을 꼬박꼬박 먹였지요. 근데 이

게 웬걸요. 낫기는커녕 며칠 뒤엔 밭두렁에

쭈그려 앉아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겁니다

.

“이 노인네, 이러다가 진짜 퍼지는 거 아냐

?”그때부터 가슴이 콕콕 쑤셔왔습니다. 마

누라는 또 멀쩡한 척 농사일을 계속하길래 ‘

그냥 또 아픈 척 하나 보다’ 싶었는데, 나중

에 생각하면 내가 참, 남편 노릇 헛한 거죠.


몇 날 며칠 지나서 또 같이 시내 나갔는데,

걸음걸이마저 위태위태하더이다. 이번엔

연륜 있어 보이는 60대 초반 의사 선생을

찾아갔더니, 이 양반 말이 또 다릅니다

.

“제가 보기엔 식도염 아니에요. 심장이

문제 같네요. 얼른 큰 병원 가보세요.”서

울 가기 전, 원주에 있는 XXX병원으로

급히 갔더니만, 거기서 아주머니 (그러니

까 마누라)를 조형술실로 들여보내고 난

후, 의사들이 줄줄이 나와서 말하대요.


“여기 보이시죠? 심장 핏줄 세 가닥이 막

혔습니다. 하나는 터졌어요. 지금 당장 수

술 안 하면 위험합니다.”


근데 문제는, 거기 그 당장 할 의사가 없다

니다. 그러니 또 서울로, XXX병원으로 앰뷸

런스 타고 날아가야 했지요. 사이렌 울릴

때마다, 귀에 들리던 건 그 소리보다도 내

가슴속에서 쏟아지던 소리 없는 통곡이

었어요.


그 와중에도 생각은 듭니다. ‘에이, 논밭

좀 팔면 되지.

뭐 사람 살고 봐야지…’


그렇게 서울로 옮기고, 장장 8시간 동안

개복 수술을 했지요. 마누라의 왼쪽 다리

에서 지렁이처럼 생긴 핏줄을 잘라 심장

에 붙였다 카더라고요. 수술 끝나고 숨을

쉬는 걸 보니까 살았구나 싶었지요.


근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습니다. 간병인

주야간 교대 두 명에, 병원비만 3천이 넘

었어요. 보험도 잘 안 되어 있던 차에,

아휴, 우리 농사꾼한테 그 돈은요, 지게 두

개 짊어진 셈이지요.


그래서 아이들 왔길래 말했죠. 마침 종이

커피잔 들고 있던 김에 한 마디 했습니다.

“야, 이놈들아.

니들 어릴 때 니들 엄마가 젖 먹여 키웠지?


지금이 그 ‘찌찌값’ 좀 갚을 때 아니냐?”

했더니, 옆에 있던 마누라가 말도 없이 내

옆구리랑 궁둥이를 잡아 비틀더니, 멍이

시퍼렇게 들게 만들 더라고요. 그 멍자국

은 며칠이 가도 안 빠지더이다.


결국 ‘찌찌값’은 못 받고, 마누라 손톱자국

과 시퍼런 멍만 얻었지요. 아이들은 서울

살이 힘들다며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고,

나는 그저 속만 뒤집혀서 시골 땅 몇 마지

기 팔아 치료비 메꿨습니다.


그래도… 마누라는 살았습니다.

지금도 밭에 나가면, 그날 들었던 사이렌

소리가 귀에 아른 하고, 서울 병원 창밖에

서 흘렸던 그 눈물이 논에서 흐르는 물 처

럼 머릿속에서 흐릅니다.


“찌찌값”은 못 받았지만, 그날 마누라 살

펴낸 덕분에, 나는 지금도 밭에서 일하고,

마누라는 집에서 김치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요… 돈은 빠져나가고 멍은 들어

지만, 그래도 사람 하나 살렸다는 게 인생

최대의 이문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

도 쟁기 들고, 괭이 메고, 내 삶의 밭두렁

길을 다시 한번 활력 있게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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