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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May 19. 2017

"잘 먹었습니다."

일단 메뉴를 손 봐야 했다. 엄마가 잘 만들 수 있는 음식이 뭘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뭘까? 가게에 손님이 없으니 시간이 나면 맛있다는 집에 가 밥을 먹었다. 그닥 맛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런 맛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가.

그제서야 창업 관련 출판사에 다니며 읽었던 책의 내용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주 고객층은 누구인가?
고객의 니즈는 무엇인가?
현금을 벌어들일 캐쉬카우는 있는가?
블루오션은 무엇인가?
선택과 집중을 적절히 했는가?
우리의 장점은 무엇인가?

이 동네는 농어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근처에 큰 회사가 있어 회사 직원들과 하도업체 일용직 직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많으니 고기 메뉴가 필요하다. 엄마는 고기의 잡냄새를 잘 잡는다. 외식이 익숙하지 않은 시골사람들에게는 싸고 맛 좋고 양 많은 음식이 제일이다. 근처 음식점에서 팔지 않는 음식을 팔아야 한다. 엄마와 딸이 밥집을 하니 술 손님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안주류보다는 식사류를 늘려야 한다. 무엇보다 조미료 범벅인 바깥 음식에 질린 사람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대접하고 싶다.

여러 가지 판단 끝에
제육쌈밥이
첫 번째 새 메뉴가 되었다.
제육볶음과 된장찌개,
쌈채소와 흰쌀밥 한 공기가
모두 합해 만원.     

가게에 그림을 그려준 친구에게 전화를 해 포스터 디자인을 부탁한다. 가게에 그림을 그려주었을 때도 못 챙겨줬는데, 이번에도 챙겨주지 못하게 됐다. 대신 우리 집에 오면 모든 메뉴는 공짜. 그래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못하는 건 미안하다. 친구는 흔쾌히 내 부탁에 응해주었다. 일주일 후 노란 바탕에 귀여운 그림이 들어간 포스터가 도착했다. 새 메뉴는 개시도 안했는데, 포스터만 보아도 뿌듯하다.

우리를 구원한 효자 메뉴의 위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아주 조금은 벗어난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새 메뉴는 인기가 있다. 가게를 열고 처음으로 음식이 맛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감격스런 순간이다. 음식이 맛있다는 말을 하고 나가는 손님에게 절이라도 할 판이다. 엄마와 나는 그날, 종일 그 손님 얘기만 했다. 바닥을 친 자존감이 아주 조금 떠오른다.

처음의 절망감을 잊을 수 없었던 엄마는 이후로 음식 연구에 몰두했다. 음식 관련 프로그램을 보며 컴컴한 방에 앉아 한참을 끄적였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온갖 요리법을 읽기도 했다. 가끔은 엉뚱한 식재료를 가미해 맛을 보라며 날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엄마와 최악은 면했지만 여전히 손님 없는 가게 홀을 보며 나는 새 메뉴를 고민했다.

엄마가 잘하는 음식이 뭐더라.
내가 뭘 제일 맛있게 먹었더라.
서울 생활하며 어떤 음식이 제일 그리웠더라.

그렇게 두 번째 새 메뉴인 국물떡볶이가 등장했다. 새 메뉴에 탄력을 받은 가게에는 시래기 고등어찜이, 갈비찜이, 김치찌개가, 닭도리탕이, 만둣국이 연이어 등장했다. 따뜻한 밥을 정성껏 대접하고 싶은 엄마와 정신없는 걸 딱 싫어하는 나를 위해 식사 메뉴는 예약제로 운영한다. 손님이 전화로 방문 시간과 메뉴를 말해주면, 그 시간에 바로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모든 세팅을 마친다. 맛 평가단은 다른 개업 식당으로 갔는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손님상의 갈비찜이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한 컷


“잘 먹었습니다.”
“다음엔 다른 거 먹으러 올게요.”
“이렇게 퍼주시면 뭐가 남겠어요?”

맛있게 밥을 먹고 잘 먹었다며 인사를 하고 나가는 손님이 있으면, 엄마와 나는 시야에서 그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본다. 우리 가게에서 밥을 먹고 나가면서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이 되기를, 다음 끼니때가 될 때까지 뱃속이 따뜻할 수 있기를, 속상한 일이 있어도 힘든 일이 있어도 밥심으로 이겨내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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