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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Jul 25. 2017

집중이라는 것을 하고 싶다고?

방학 시즌이 되니 편집해야 할 원고들이 모여든다. 작업하는 도서의 주 저자층은 선생님이나 교수님이다. 그들은 방학에 집필이나 출간 작업을 진행한다. 바야흐로 재택근무의 계절이 된 것이다. 


"여보세요?"

"네, 네, 바로 처리해드릴게요."

"컴퓨터 켜고 다시 전화드릴게요."


프리랜서라면 응당 후리 하게 일하는 것을 상상하기 마련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낮이고 밤이고, 식당이 바쁠 때고, 술을 마실 때고, 너무나 갑자기 전화가 온다. 대부분 급한 용무로, 작업 기간은 이삼일 준단다.


프리의 세계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나로서는 작업 기간이 짧든, 작업비가 적든, 거절할 처지가 아니다. 일단은 뭐든 받아서 해야 한다. 일이 끊기면 생계도 위험하다. 


정말 바쁠 땐, 그 좋아하는 친구도 끊고, 점심 장사만 마치면 집구석에서 일만 한다. 수입이 규칙적이지 않으니, 작업실 구하는 건 포기. 조카가 뛰어놀고 소리치는 너른 벌판 같은 집에서 조용히 우그러져 일을 한다. 조카느님 뛰시는 데 잔소리는 감히 꿈도 못 꾸고.


"싼타 할아버지 왔다. 선물 받아라."

"네, 감사합니다."

"어, 뭐 하는 거야? 나도 볼래."

"응. 이모 일하는 거야."


동네 카페에도 가봤다. 다른 손님들이 내 새 하얀 노트북 모니터를 힐끗하고 지나간다. 노트북 자랑하러 온 거 아닌데... 조용히 노트북을 닫고 나와 다시 집으로 간다. 가게 브레이크 타임도 노려봤다. 불이 켜져 있으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 엄마가 있는 줄 알고 벌컥벌컥 들어와, 멋쩍게 몇 마디 하곤 가신다. 


하하하!!! 저 집중 좀 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독립군이라도 되는 양 밤에 몰래 일한다. 다행히 식구들이 초저녁 잠이 많아 8시만 돼도 집은 조용하다. 


그런데! 그런데! 여름밤은 벌레가 많다. 하루살이도 있고 무당벌레보다 조금 큰 까만 벌레도 있다. 쓰르르쓰르르 귀뚜라미까지 울어준다면 정말 멋진 여름밤이 될 텐데. 물론, 일만 없다면 말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이렇게 2주를 버리고 나니 그 시끄러운 데서도 집중이 된다. 조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에서 뛰어도, 예약 손님으로 인한 엄마의 호출에도, 술을 마시자는 친구들의 전화에도. 일단 책상 앞에 앉으면 집중력이 베레베레 올라간다. 


이렇게 힘들게 밥벌이하는 언니의 노고도 몰라주고, 동생은 가끔 묻는다.


"언니, 일 제대로 하는 거 맞아?"

"무슨 소리야?"

"일하는 걸 볼 수가 없어."

"밤에 몰래 해."

"맨날 누워 있기만 하는데 무슨 일을 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에라이. 내가, 응? 교정지를 가져다가, 응? 펼쳐줄 수도 없고. 벽돌을 쌓아 집 짓는 일이 아니니, 내가 일하고 있다는 걸 식구들이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들이 보기엔 그저, 한량 하나가 하루 종일 누워 있다 저녁에 겨우 책상 앞에 앉아 몇 시간 꾸물거리는 걸로 밖엔 보이지 않겠지.


몇 주 전, 근처 대학 캠퍼스 도서관에 특별회원으로 가입하면 24시간 도서관 열람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래서 지금, 특별회원 자격으로 대학 열람실에 앉아 있다. 기숙형 학교라 방학에 사람이 없어, 조만간 열람실을 폐쇄하고, 도서관을 개방해주겠다는 공고문이 붙어 하루살이같이 오늘까지려나, 내일까지려나 눈치 보며 앉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사무실을 뛰쳐나오며 쾌재를 불렀지만, 일터 없이 먹고사는 건 역시 쉽지 않다. 보따리장사처럼 교정지와 노트북을 싸들고 다니며 일해야 하고, 저자느님이 S.O.S.를 외치시면 서울까지도 한달음에 달려가야 한다. (모든 작업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난 발로 일하는 걸 신뢰하는 편이다.) 동네에 사람이 없어 식당엔 알바를 쓸 수도 없다. 점심 장사를 마치고 서울에 가 미팅을 끝냈는데 밤이 늦으면, 친구 집에서 자고 아침 일찍 내려간다. 점심 장사 때 자리를 비울 순 없지.


이리저리 널 뛰듯 일하지만 작업비는 늘 내 손에 잠시 머물다 떠난다. 고정 수입이 아니다 보니, 받자마자 쓰기 바쁘다. 물론 월급 받을 때도 통장에 돈을 쌓아놓고 생활하진 못했다만. 


여하튼, 일이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지금 내 옆에는 한 번 펼쳐보지도 못한 교정지가 있고, 마감을 쪼기 위해 전화 앞에서 대기 중인 거래처 직원들이 있다. 


자, 이제 일만 하면 되겠다. 노트북만 덮으면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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