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여전히 아프냐? 희귀한 사람이란다.
살면서 처음 겪어 보는 일이 많은, 나에게 2021년은 그렇게 기억이 되는 해이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을 만나는 것에 제한이 생기고, 명확한 원인을 알 수 없이 몸에 이상이 생기고, 그로 인하여 처음으로 진지하게 과거를 돌아보고, 다음을 생각했다. 그렇게 의미 있는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역시, 잘했던 일보다는 아쉬웠던 일, 그런 결과를 야기한 선택에 대한 아쉬움... 다들 아프지 마시길, 아니 아프기 전에 후회 없이 잘 살길 바라봅니다.
해가 바뀌어 2022년이 되었지만 나의 삶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삼시 세끼를 챙기고 컨디션이 좋으면 가능한 범위 안에서 근력과 걷기 운동을 하면서 좋아지길 기다렸다. 날씨가 좋은 봄이 오면...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지만 역시나 인생은 생각처럼 흐르진 않는다. 몇 달 동안 사람들과 연락을 거의 안 해서 잘 울리지 않던 전화가 오랜만에 울렸다. 폰에 뜬 사람은 회사 사람, 새해를 맞이한 안부 전화인가?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 살면서 항상 느꼈던, 말이라는 게 참~ 어렵다. 화자의 의도와 청자의 이해가 상이한 경우가 많아, 때때로 서로 오해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래서 언제나 말은 조심조심(그렇게까지 살지는 못했다, 안다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튼 내가 느낀 표면적 이유는 팀 업무의 뻑뻑함, 이면적 이유는 이해관계의 충돌, 회사의 구성원으로 함께 갈지, 아니면 이번 역에서 빠르게 내릴지를 결정해야 된다.
단순하게 생각했다. 쉬면서 자연과 함께할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사람과 함께할지. 후자를 선택했다. 언젠가 회복이 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몸 상태가 좋아지지 않더라도 유지는 할 수 있을 거라는 이유 없는 자신감, 건강했더라도 마지막 회사 생활이라고 생각했던, 이대로 끝내긴 설명할 수 없는 아쉬움, 동료의 따뜻한 말 한마디 등, 복합적인 이유가 나를 회사로 이끄렀다.
다시 출근한 회사, 적당히 반겨주는 사람들, 오랜만에 앉은자리, 쉬면서 연습했던 왼손 사용법, 간단한 글쓰기와 밥 먹기 가능한 젓가락질... 이때의 몸 상태는 오른손 아웃, 뛰는 건 불가능, 말하는 속도 느려짐, 2022년 2월.
사람마다 느끼는 힐링 포인트가 다르다. 아니 그때그때 원하는 게 다른 낭만이 있는 털형은 이때만큼은 사람들 속에 있고 싶었다. 지금과 다르게 고독을 즐길 준비가 안 된, 외로운 상태였던 것 같은데. 마음과 몸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몸에서 1차 경고를 보냈다. 참을만했던 목 디스크가 또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 2주간의 휴가, 2022년 4월.
봄은 사람의 마음을 살랑살랑하게 하는 힘이 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왠지 아름다운 여성분이 말을,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식후 산책은 아니지만,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는 게 쉽지 않다. 때론 함께, 주로 혼자서 회사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에어팟과 함께하는 판교 탐방은 언제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2022년 7월경으로 기억한다. 퇴근길, 비가 퍼붓는 날, 전철역에서 집까지 약 1km, 우산을 들고 걷기 시작, 얼마 못 가서 우산이 무겁다고 느끼는 순간이 왔고 과감하게 버렸다. 어찌나 편하던 지, 어차피 뛰는 게 안 되는 지금, 천천히 쏟아지는 비를 다 맞고 걸었다. 어찌나 시원하던 지, 어쩌면 이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한계가 곧 올 거라는 것을.
힘든 순간이 오면, 다가온 현실을 강하게 부정한다. 인정하는 순간 내가 알고 있는, 원치 않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아서. 신경 계통 약을 1년 정도 복용했지만 결국 데드라인으로 정해놓은 증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말을 하고 싶은 데 말이 목구멍에서 씹히는, 어찌나 답답하던 지, 물 없이 미숫가루 먹는 느낌으로 말을 하는 것 같던데. 신나게 병원으로 뛰어가 근위축 어쩌고저쩌고(근육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무시무시한 질환), 생명 연장을 위한 약을 먹고 싶습니다. 그렇게 희귀병 진단을 받고 약값 할인을 받았습니다. 좋다 좋아요~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싶었는데, 영화에서 본, 이야기의 주인공 캐스팅 확정! 2022년 9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회사에서 힘든 순간이 오면 동네 형 같은 에릭과 편하게 대화를 한다. 가벼운 위로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안,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팀의 대장인 션과 이야기를 한다. 역시 가벼운 위로, 공식적인 프로세스에 대한 논의, 좋은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인사 팀장과 대화.
처음이다. 벤처, 소규모 회사만 다녔던 나에게 인사 팀장이란 게 생길 줄이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몸이 불편한 직원이 지 발로 나간다는 데, ‘고생했습니다. 나가실 문은 어딘 지 아시죠?’ 대충 이런 분위기의 대화를 예상했다. 이미 지가 퇴사를 결정하고 온 털형에게,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제안했다. 재택, 파트타임, 휴직 등 퇴직 말고도 선택할 수 있는 길,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하는 위로의 말들, 가장 기억에 남는 말,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묘한 경험이었다. 이런 경우 이렇게 하세요,라는 회사의 매뉴얼이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세 사람 모두 그렇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따듯해지는 건 사람이 주는 힘이 아닐까. 2022년 10월.
재택 2달 후, 휴직을 결정했다. 마지막 날, 회계팀의 어느 분이 주신 스벅 자몽허니블랙티 따뜻하게 잘 먹었습니다. 돌아올 곳이 있다면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돌아올 곳이 있다면 운이 찾아오지 않을까. 2022년 12월 28일.
일로 만난 사이, 그래도 감사한 분들이 많다. 측은지심, 그래도 고마운 분들이 많다
살면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단지, 그중에 맞지 않은 사람만 있었을 뿐. 다들 지만 맞지요. 지금은 나만 세게 머리를 맞은 거 같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글을 읽고 있는 당신만이라도 낭만털형이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는 그날을 기대하길 바라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