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사랑

그렇지만 진부함이란 늘 정답에 가깝다

by 배철수철수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그대를 사랑하기란 늘 어렵다. 목적지에 다 와가는 듯하다가도 여차 하는 순간 여전한 그 자리였음을 깨닫는다.

일련의 사건에 뒤따른 약간의 상실감, 허무, 씁쓸함이 독주를 삼킨 후의 목구멍에서 그러듯 알싸히 머물다 서서히 증발한다. 독기가 사라진 뒤엔 여운이 맴돈다. 여운은 꽤나 상쾌하고, 은은하게 달다.

여운에 잠긴 나는 생각해 본다. 과거의 나는 독주는커녕 조금의 쓴 잔도 허용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허용하고 말고 할 능력이 없다는 걸 알기에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운행하는 거대한 섭리 내지 힘은 내가 그 잔에서 고개를 돌리도록 허락하지 않더랬다. 나는 원치 않는 독주를 삼켰고, 독한 술기운은 꽤나 길었다.

하지만 말했듯 오랜 숙취와 기다림 끝에 회복된 내겐 그 독기를 즐기고 이용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독기에 휘둘리지 않는 한 잠시간의 쓴 맛 뒤엔 은은한, 때론 강렬한 황홀함이 따른다.

요즘 나는 혼자서도 독주를 즐긴다. 여전히 맥주를 가장 사랑한다마는, 그래도 가끔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독주는 꽤나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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