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지

by 배철수철수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혹 그리다가 처음 구상과는 다른 작품이 나올지라도 아무렴 어떠리, 그저 좋다던, 어떤 모양새로든 그저 그림을 그리는 자체로 유일한 기쁨일 뿐이라던 처음의 다짐은 신기하리만큼 유려하게 수놓이는 선과 색들에 마음을 뺏겨 고집이 되고 맙니다.

예상치도 못할만치 아름답게 그려지는 탓에 이 그림이야말로 내 운명이라는 착각에 빠지고 만 것이지요.

자유로웠던 기쁨은 집착이라는 굴레가 되고 원하는 선이 그려지지 않을때마다 괴로움이 쌓입니다. 이미 그려놓은게 얼마인데,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순 없습니다. 분명 처음엔 뭐가 됐건 그림 그리는 자체로 즐거워했는데 말이에요.

기적처럼 막힘없이 그려지던 선이 멈추고 내 손은 갈 길을 잃습니다. 더 그리지도, 그리길 그만두지도 못하는 나는 그저 펜을 쥔 채 힘겨워합니다. 용기와 집착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있네요. 거의 다 그려놓은 그림이 아쉽고, 새로 그릴 그림은 맘에 안들까 두려워요.

마침내 결심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려왔던 그림을 모조리 지워버리기로. 어차피 더 그리지도 못하는 원래의 그림, 깔끔히 지운 후 새로 그리렵니다. 집착도 고집도 욕심도 모두 내려놨습니다. 처음의 마음 그대로 돌아가 어떤 모양으로 나오든 그저 그림을 완성해보리라 다짐해봅니다.

슥슥슥 자연스레 가벼이 그리다가 점차 미친듯이 꾹꾹 눌러 그렸던 흑연의 자취들을 시간 순서 따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지웁니다. 나중에 그어진 선들은 어찌나 힘을 세게 주고 그렸는지 깊게 자국이 남아 쉬이 지워지지도 않네요. 그에 맞게 지우개를 쥔 손에도 힘을 주니 도화지가 벗겨지고 찢길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그치만 도화지를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결심한대로 묵묵히 지워나갈 뿐입니다.

감사하게도 도화지는 다치지도 않고 내가 첫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때부터 지우기까지의 모든 방황을 기다려줍니다. 거친 흑연을 칼처럼 쥐어 그렇게 난도질을 했는데도, 멋대로 그린 그림이 이젠 맘에 안들어 거친 지우개로 벅벅 긁어내는데도, 당신은 아픈 내색 하나 없이 기다려줘요. 그리고 다음에 그릴 그림은 더 기대된다고 말해주네요.

모두, 아주 모조리 지워버린 지금에서야 알겠습니다. 정말 기적은 수려하게 신들린듯 그려지던 선들이 아닙니다. 그 선들은, 그 선들로 완성될 그림은,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게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건 운명도 기적도 축복도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아쉽지도, 아깝지도 않아요.

정말 진실된 기적은 내게 마음껏 그림을 그릴 도화지가 준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외엔 필요 없어요. 당신의 존재만이 내게 유일한 기적이며 축복이자 운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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