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원 Nov 12. 2024

23. 같은 새해 다른 해

1월 1일 작은 변화를 만드는 조미료

어른의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미 다 겪어본 경험이라 새로움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린아이에게는 아이스크림 한 입도 별이 쏟아지고, KTX를 타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그러나 우리 어른에게는 아주 맛있는 아이스크림도 순간의 자극일 뿐이며, KTX도 단순한 이동수단으로 여겨질 뿐이다.


나도 모든 것이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새롭지 않다고 느껴지는 나에게 다양한 운동들이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예를 들어, 겨울을 보내는 새로운 방법 중 하나로 설산을 오르거나, 익숙했던 장소를 등산이나 러닝을 통해 새롭게 경험하는 순간들 말이다.


당장 집 근처만 보더라도, 달리기를 통해 얻는 기쁨이 컸다. 그저 집 앞 차도 옆 길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러닝에 적합한 코스였고, 그 길 끝이 자주 찾던 공원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새로운 설렘이 밀려왔다. 러닝을 하지 않았더라면 길이 연결된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또, 의외로 우리 집이 다른 도시와도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차로만 닿을 수 있을 것 같던 거리도 두 발로 뛰어가니 꽤나 가까운 ‘내 여행지’로 다가왔다. 이제 10km쯤은 별것 아니라 여겨지는 나에게, 왕복 15km 거리에 있는 도시는 두 다리로 갈 수 있는 작은 여행지가 되었다.


운동은 지루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자극을 준다. 그래서 꼭 심심한 찌개에 맛을 더해주는 조미료 같다. 몸에도 좋은 조미료라면, 나는 이 조미료를 평생 끊지 못할 것 같다.




매년 12월 31일이면 가족과 집 근처 절에 올라 종을 치며 새해를 맞았고, 다음 날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로 하루를 시작했다. 정동진처럼 일출이 아름다운 장소를 찾는 사람도 많지만, 사람이 붐비는 곳을 선호하지 않는 나에게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새해는 그저 12월 31일의 다음 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올해 1월 1일은 운동과 함께 맞이하고 싶었다. 일출을 보며 등산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지만, 일출 명소는 높은 산일 지라도 사람이 많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과감히 산을 포기하고 10km 마라톤을 떠올렸다. 새해 첫 공기를 마시며 달리면 얼마나 상쾌할지 기대되었다.


평소에 접수하는 마라톤이라면 혼자서도 신청을 했겠지만, 이번에는 주위 사람들과 함께 참가하고 싶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떡국도 먹고 마라톤으로 건강도 챙기자고 말하며 설득했다. 다행히 친구도 10km라면 괜찮다며 흔쾌히 동참해 주었다.


새해 첫날에 마라톤에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비록 아직 접수만 한 상태였지만, 알차고 뿌듯한 계획을 세웠다는 생각에 흡족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겨울이라 길이 미끄럽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지난 12월 마라톤 때는 눈이 내리지 않았기에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12월 31일에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 마지막 날에는 도저히 12시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다음날 새벽같이 한강으로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졸린 눈을 참지 않고 잠들었다. 한 해를 열심히 보낸 나에게 주는 달콤한 선물 같은 잠이었다.


일찍 잠든 덕분에 새벽에 일어나 마라톤 준비를 했다. 귀를 덮을 헤어밴드와 장갑을 챙겼다. 겨울 야외 운동에서는 몸 끝 부분을 보온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땀이 나더라도, 추위에 떨며 감기에 걸리기보다 보온이 우선이었다.


날씨는 정말 좋았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준비 운동하러 나간 도림천에는 붉은 태양이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친구와 함께 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비록 몇 장뿐이었지만, 그 속에는 올해의 다짐과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두 번째 마라톤 출전이라 긴장되지는 않았다. 이전과 같이 출발선에 서서 손가락을 접으며 출발을 외쳤다. 사회자는 새해를 이렇게 마라톤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칭찬에 마음이 한층 더 부풀어 올랐다.


“즐기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발걸음을 떼며 길을 달렸다. 예상대로 길이 미끄러워 속도를 낼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여유롭게 뛰며 반환점을 돌아 도착선에 들어섰다. 단순히 출발해 도착한 것일 수도 있지만, 새해에 마라톤을 완주하니 모든 것을 이룬 듯한 느낌이었다. 특별한 계획이 없어도, 근사한 성과가 없어도 건강하게 이 길을 완주한 나 자신이 만족스러웠다.



마라톤은 똑같은 거리도 매번 다른 느낌을 준다. 새해 첫날에 시작한 나의 이 작은 여정은 아침 일찍 깨어난 발걸음들이 모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만의 호흡과 속도에 집중하며 새롭게 다잡은 마음가짐과 완주의 기쁨이 컸다. 그래서 아마 내년 1월 1일에도, 그 이후에도 같은 새해지만 다른 해를 계획할 것 같다.


심심했던 일상에 자극을 주는 이 조미료가 참 좋다. 부디 질리지 않고 오래도록 즐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