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이 알려준 겨울
겨울이 좋아, 여름이 좋아?라고 묻는다면, 예전에는 겨울이 좋다고 답했겠지만, 요즘은 여름이 더 좋다. 운동을 하면 어차피 땀이 흐를 수밖에 없으니, 덥더라도 땀을 시원하게 쏟아내는 여름이 오히려 더 반갑다. 겨울에는 몸이 풀리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눈이라도 내리면 빙판길이 생겨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게다가 겨울은 일단 실외로 나가는 것부터 큰 도전이다. 따뜻한 이불에서 벗어나는 게 1단계, 한기가 드는 차가운 운동복으로 갈아입는 게 2단계,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 찬바람을 뚫고 운동하러 가는 것이 3단계다. 이 모든 단계를 통과했다면, 운동을 다 하지 않아도 이미 절반은 해낸 셈이다.
봄, 가을이 짧아진 요즘, 그 순간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벚꽃도 보고, 단풍도 즐겨야 하고, 날씨가 좋아서 자전거도 한 번쯤 타줘야 한다. 그리고 봄, 가을마다 열리는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다 보면 눈 깜짝하는 사이에 무더위와 한파가 다가와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점점 겨울을 덜 좋아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겨울을 좋아할 수 있는 건, 한 해를 마무리하며 주위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의 나는 어땠는지, 소홀히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며 따뜻한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계절이다. 겨울은 마치 오래된 사진앨범을 여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해 준다.
등산을 시작하기 전에는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생소한 산들이 많았다. 하지만 등산을 시작한 뒤로는 계절마다 아름다운 산들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지역을 생각하면 산이 먼저 떠오른다. 봄, 여름, 가을에는 매달 꾸준히 산을 탔다.
겨울에는 어떤 산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SNS에서 덕유산 사진을 보게 되었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산은 이전에 보았던 한라산과는 또 다른 겨울왕국 같았다. 상고대(*고산지대의 나뭇가지에 밤새 내린 서리가 하얗게 얼어붙어 눈꽃처럼 피어나는 것)가 환상적으로 피어 있었고, 능선을 넘는 풍경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 덕유산 향적봉을 가야겠다!
12월, 올해 마지막 산행은 덕유산으로 정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등산 버스를 예약했다.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가끔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간절히 바라면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갑작스러운 폭설로 덕유산을 향하는 길이 전면 통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예약한 등산버스는 취소되지 않았고, 당일 아침에 다른 산으로 계획을 바꿔 선자령으로 향하게 되었다. 버스 전광판에는 여전히 '덕유산'이라 적혀 있었지만, 갑작스레 강원도로 향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뿐만은 아니었는지, 휴게소에는 행선지가 덕유산으로 적힌 버스가 참 많았다.
겨울 산 중에서 덕유산이 최고라는 말을 들었던 터라 조금 아쉬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산을 오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선자령으로 향했다. 무척 추운 날이었다. 한반도에서 추위를 자랑하는 강원도의 매서운 칼바람은 한층 강렬하게 느껴졌고, 휴게소에서조차 살을 에는 바람에 말단이 꽁꽁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선자령은 정말 새하얀 세상이었다. 왜 스키장이나 새하얀 눈 때문에 실명사고가 종종 일어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새하얀 눈 때문에 눈을 뜨기 어려웠고, 영하 20도라는 온도가 거짓이 아니었는지 바깥으로 노출되는 피부가 아려왔다.
뜻하지 않는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선자령을 올랐다. 그래도 오르막을 조금 오르니 땀이나 추위가 조금씩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물론 나무가 에워쌀 때뿐이었지만 말이다. 광활한 평지에서는 새들도 바람에 밀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앞으로 가고 싶어도 힘이 드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정상석에서는 낮은 온도의 여파로 핸드폰이 방전되는 사람이 속출했고, 사진 줄을 기다리다 저체온증에 걸릴까 급히 내려가는 사람도 많았다. 나 역시 손끝이 얼얼해 얼음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핸드폰을 터치하기 위해 장갑을 조금이라도 벗을 때면, 1분도 채 안되어 손가락이 또각하고 부러질 것만 같았다.
결국 나도 정상을 보고 빠르게 하산했다. 나무가 바람을 막아주는 곳에 들어가야 살 것만 같았다. 오늘의 산행 푸드는 발열라면이었지만, 이 추위에 어떻게 먹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겨울 산은 처음이라 몰랐는데, 등산을 자주 다니는 분들은 투명 비닐로 만든 쉘터 안에서 따뜻하게 식사를 하고 계셨다.
봄부터 가을까지 꽤 많은 산을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겨울 산은 또 새로웠다. '쉘터'라 불리는 그 투명 비닐이 참 부러웠다. 쉘터가 없던 나와 친구는 꽁꽁 언 손으로 발열라면을 겨우 조리하며, 정말 조난당했다가 구조된 사람처럼 라면을 먹고 하산했다.
영하 20도에서 맛본 겨울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겨울 산에서는 두꺼운 장갑이 필요하다는 것, 핸드폰 터치를 위한 펜이 필요하다는 것, 식사할 땐 쉘터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 등 많은 걸 배웠다. 이제 산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겨울 산을 통해 내가 아직 한참 멀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또 하나, 겨울을 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아주 추워서 친구와 온몸을 떨며 산을 올랐지만, 설산의 묘한 기쁨을 알아버렸다. 결국 우리는 '설욕전'이라 칭하며 덕유산을 다시 찾았고, 비닐 쉘터를 꼭 챙겨 갔다. 이후엔 치악산과 한라산까지 올라 겨울 산의 추억을 더하게 되었다.
눈꽃이 만개한 겨울 산은 어쩌면 다른 계절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요한 매력이 있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따뜻한 프라푸치노처럼, 차갑지만 돌이켜보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따뜻한 추억이 많았다. 이제 나는 겨울을 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법을 얻었다. 설산이 알려준 겨울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